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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고집이 세다"는 말은 대개 칭찬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브랜드의 세계에서는 좀 다릅니다. 오래 기억에 남는 브랜드를 떠올려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거든요. 무언가를 끝까지 양보하지 않았다는 것. 어떤 브랜드는 60년째 같은 구조를 지키고, 어떤 브랜드는 매출에 도움이 될 성분을 일부러 빼고, 어떤 브랜드는 규모를 키울 수 있는데도 확장을 거절합니다. 바로 그 고집이, 이 브랜드들을 오래 기억되는 브랜드로 만든 겁니다. 고집은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양보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그 선택에는 반드시 무게가 따릅니다. 이번 노트에서는 브랜드의 고집과, 그 고집이 짊어지는 무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Chapter B
Backbone: 고집에는 무게가 있다고집이 좋은 것이라고만 말하면, 반쪽짜리 이야기입니다
브랜드의 고집을 다루는 글은 대부분 이렇게 끝납니다. "그 브랜드는 원칙을 지켰고, 결국 성공했다." 멋진 이야기이긴 한데, 빠진 게 있어요. 그 고집을 지키는 동안 그 브랜드가 짊어진 것은 무엇인가. 모든 고집에는 무게가 따릅니다. 그 무게는 때로 포기의 형태로 나타나죠. 감각적 매력을 내려놓거나, 규모를 키우지 않거나. 때로는 책임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것이 어떤 형태든, 고집은 공짜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고집에 무게가 따른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 무게를 알고 짊어지고 있느냐입니다. 무게를 모르고 지고 있다면 그건 관성에 가깝고, 알면서 지고 있다면 그건 전략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가 고집이 있는 브랜드와 고집불통인 브랜드를 가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무게를 다루는 방식에는 '감수'만 있는 건 아닙니다. 무게를 알고, 그 무게를 덜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는 브랜드도 있어요. 고집의 본질은 지키면서 무게의 구조를 바꾸는 것. 이것이 고집이 오래 살아남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지금부터 네 브랜드의 사례를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네 브랜드 모두 고집이 있고 그만큼의 무게도 지고 있는데요, 양상이 달라요. 이 점에 주목해서 보겠습니다. Chapter C
Conviction: 무게를 알고 짊어진 브랜드들가구, 화장품, 커피, 어묵 — 고집의 네 가지 무게
Case Study 01
USM — 약속을 지킨다는 것의 무게
스위스 가구 브랜드 USM은 1965년, 건축가 프리츠 할러(Fritz Haller)와 함께 모듈형 가구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USM 할러(USM Haller)라는 이름의 이 시스템은 크롬 튜브, 볼 조인트, 금속 패널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기본 구조는 60년째 바뀌지 않아오고 있습니다. USM이 구조를 바꾸지 않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부품 호환성. 수십 년 전에 산 USM의 부품을 오늘 산 USM에도 끼울 수 있게 해주려는 것. 구조를 바꾸는 순간, 이 호환성이 깨지고 브랜드의 약속도 함께 무너집니다. USM의 고집이 짊어진 무게는 '포기'가 아니라 '책임'입니다. 60년 전 제품을 산 사람에게 한 약속을 오늘도 지켜야 한다는 것. 그래서 컬러를 추가하거나 새로운 모듈을 더하는 변화를 꾀하더라도, 기본 구조 자체는 건드리지 않는 고집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건 생각보다 무거운 일입니다. 가구 시장은 매 시즌 새로운 디자인과 소재로 관심을 끕니다. USM은 그런 식의 관심을 만들기 어려운 구조를 스스로 선택한 거예요. 대신 USM이 쌓아온 건, "한번 사면 평생 쓸 수 있다"는 신뢰입니다. 이 신뢰는 60년간 같은 구조를 지켜온 책임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Case Study 02
드렁크 엘리펀트 — 매력을 내려놓는다는 것의 무게
드렁크 엘리펀트(Drunk Elephant)는 창업자 티파니 마스터슨(Tiffany Masterson)의 질문에서 시작했습니다. "내 피부가 왜 이렇게 예민해졌을까?" 답을 찾아가면서 그녀는 화장품에 널리 쓰이는 성분 여섯 가지를 지목했습니다. 에센셜 오일, 건조 알코올, 실리콘, 화학 자외선차단제, 향료와 염료, SLS(소듐라우릴설페이트). 마스터슨은 이 여섯 가지를 'Suspicious 6'라고 이름 붙이고, 모든 제품에서 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고집의 무게는 소비자가 바로 느끼는 곳에 있습니다. 실리콘을 빼면 바르는 순간의 매끈한 느낌을 만들기 어려워집니다. 향료를 빼면 소비자가 기대하는 익숙한 향이 없습니다. 에센셜 오일은 라벤더, 티트리 같은 식물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화장품에서 '자연 유래'를 내세울 때 가장 많이 쓰이는 대표적인 원료인데, 천연임에도 피부를 자극할 수 있는 휘발성 화합물을 포함하고 있어 드렁크 엘리펀트는 이걸 빼기로 합니다. 빼는 순간, '자연에서 온 성분'이라는 강력한 마케팅 내러티브를 쓸 수 없게 되죠. 소비자가 처음 제품을 발라보는 그 몇 초 — 향, 텍스처, 발림성 — 는 구매를 결정짓는 강력한 순간입니다. 드렁크 엘리펀트는 이 순간의 매력을 상당 부분 내려놓은 거예요. 대신 얻은 건, 성분을 읽는 소비자의 신뢰입니다. "이 브랜드는 뺄 건 빼고 만든다"는 확신. 2019년 시세이도가 이 브랜드를 약 8억 4,500만 달러에 인수했는데, 이 숫자는 매력을 내려놓은 고집이 시장에서 어떤 무게로 인정받았는지를 보여줍니다. Case Study 03
프릳츠 — 규모를 내려놓는다는 것의 무게
프릳츠는 서울의 작은 커피 브랜드입니다. 2014년 마포구 도화동에서 시작했고, 지금도 소수의 직영 매장만 운영합니다. F&B 브랜드가 인기를 얻으면 일어나는 일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프랜차이즈 제안이 들어오고, 투자를 받고, 매장을 늘리고, 전국으로 확장을 하죠. 프릳츠는 이 과정을 거의 거부해왔어요. 프랜차이즈를 하지 않고, 적극적인 마케팅도 하지 않고, 매장도 직접 관리할 수 있는 숫자만 유지합니다. 이 고집의 무게는 분명합니다. 프랜차이즈를 열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규모의 브랜드가 되어 있었을 텐데, 프릳츠는 그 규모를 내려놓은 겁니다. 이 '하지 않겠다'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 안에 '반드시 하겠다'가 비로소 보이기도 합니다. 커피와 빵의 품질을 직접 관리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 운영하겠다는 것. 확장하지 않는 게 목적이 아니라 품질을 지키는 게 목적이고, 그 결과 규모를 키우지 않는 쪽을 택한 고집 말입니다. 프릳츠의 고집이 만들어낸 건 '귀함'입니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브랜드가 아니기 때문에, 만났을 때 특별해져요. 이 귀함은 마케팅으로 설계한 게 아니라, 규모를 내려놓은 고집이 만든 부산물입니다. Case Study 04
삼진어묵 — 무게를 지되, 새 길을 연 고집
부산 영도에서 1953년에 시작한 삼진어묵은 70년 넘게 어묵을 만들고 있습니다. 고집은 분명합니다. 창업 초기부터 이어온 전통 제조 방식을 바꾸지 않는 것. 이 고집에도 무게가 있습니다. 전통 방식은 대량 생산에 맞지 않고, '어묵'이라는 카테고리 자체가 프리미엄 시장에서 주목받기 어렵습니다. 재래시장의 어묵 가게가 하나둘 사라진 건, 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삼진어묵이 앞의 세 브랜드와 다른 건 여기서부터입니다. 무게를 그저 감수한 게 아니라, 무게를 덜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부산 본점을 체험형 공장으로 새로 꾸미고, '어묵베이커리'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었어요. 어묵을 크로와상처럼 먹는 경험, 공장 견학을 관광 코스로 만든 경험. 레시피라는 고집은 그대로 두고, 그것을 담는 그릇을 완전히 바꾼 겁니다. USM은 약속을 지키는 책임을 짊어지고, 드렁크 엘리펀트는 매력을 내려놓았고, 프릳츠는 규모를 내려놓았습니다. 삼진어묵도 그 무게를 그대로 안고 갈 수 있었어요. 전통 방식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작은 규모에 머무르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삼진어묵은 고집은 그대로 두고 무게의 구조 자체를 바꿨습니다. 감수만이 고집을 지키는 방법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네 브랜드 모두, 자신의 고집에 어떤 무게가 따르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고집은 "무엇을 지키겠다"는 선언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선택이 짊어지는 무게까지 받아들일 때, 고집은 비로소 브랜드의 뼈대가 됩니다. Chapter P
Persist: 고집을 세우고 지키는 법선언에서 원칙으로, 원칙에서 조직의 장치로
사례를 읽는 것과 내 브랜드에 적용하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우리도 고집이 필요해"라는 데 동의하는 건 쉬운데, "그래서 우리 고집이 뭔데?"라는 질문 앞에서는 막막해지거든요. 이번 챕터에서는 그 거리를 좁히는 세 가지 도구를 정리했습니다. ① 고집 선언문 쓰기 고집은 머릿속에만 있으면 취향이고, 문장으로 쓰면 원칙이 됩니다. 다음 두 문장을 완성해보세요. "우리는 ________을(를) 양보하지 않는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________의 무게를 짊어진다." 첫 번째 문장은 지키겠다는 것, 두 번째 문장은 그 선택이 짊어지는 무게입니다. USM이라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는 부품 호환성을 양보하지 않는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60년간 같은 구조를 유지하는 무게를 짊어진다." 두 번째 문장이 없으면 구호예요. 무게까지 말할 수 있을 때, 고집은 실행 가능한 원칙이 됩니다. ② 고집인가, 관성인가 — 점검 질문 고집이 경직으로 굳는 건 흔한 일입니다. 정기적으로 점검이 필요해요. Q1. 지키고 있는 것이 '본질(What)'인가, '방식(How)'인가? Q2. 그 고집의 무게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 Q3. 그 무게는 고객 가치로 돌아가고 있는가? ③ 고집을 조직 안에서 지키는 장치 고집이 한 사람의 머릿속에만 있으면, 리더의 취향이지 브랜드의 원칙이 아닙니다. 조직의 원칙으로 만들려면 장치가 필요합니다. 의사결정 필터로 쓰기. 새로운 제안이 올라올 때 "이건 우리 고집과 충돌하는가?"를 먼저 묻는 겁니다. 고집 선언문이 있으면 이 질문이 구체적으로 작동해요. "우리가 양보하지 않기로 한 것을, 이 제안은 양보하게 만드는가?" 거절 아카이브 만들기. "이 고집 때문에 우리가 거절한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겁니다. 프릳츠가 거절한 프랜차이즈 제안들, USM이 거절한 구조 변경 요청들. 이 기록이 쌓일수록 고집은 단단해집니다. 나중에 새로 합류한 구성원에게 "우리는 왜 이걸 안 하는가"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자료가 되기도 하고요. 채용에 녹이기. 고집에 공감하는 사람을 뽑는 것. 면접에서 "우리 브랜드가 이런 상황에서 이걸 거절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었을 때의 반응은 꽤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Epilogue
고집은 멋진 단어가 아닙니다. 무게가 따르고, 그 무게는 매장의 숫자일 수도, 제품의 매력일 수도, 수십 년간 같은 약속을 반복해야 하는 책임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어떤 브랜드를 오래 기억하는 건, 그 브랜드가 짊어진 무게가 느껴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무게가 보일 때, 지키고 있는 것의 진심도 함께 보이니까요. 고집은 선언이 아니라, 매일 그 무게를 지는 일입니다. 다음 노트에서는 이 고집이 만들어내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고집이 구심점이 되었을 때 사람들이 모여드는 현상. 브랜드의 팬덤입니다. Positively Yours, 이나연 드림 References
USM Modular Furniture, 공식 사이트 (usm.com) Drunk Elephant, "The Suspicious 6" (drunkelephant.com) Shiseido, "Shiseido Completes Acquisition of Drunk Elephant" (2019.12) 프릳츠 커피 컴퍼니 관련 인터뷰 및 기사 삼진어묵 공식 사이트 및 관련 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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