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BCP] Note 04 / February 12, 2026
우리 브랜드의 포지션position을 살아 움직이도록ing 만들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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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클럽BCP 네 번째 노트입니다. 오늘은 브랜드 포지셔닝에 대해 품어왔던 생각을 여러분과 나눠보려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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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Brand Positioning 전략은 정말 Position + ing 하고 있나요?
포지셔닝은 브랜드 관리의 핵심 축이자, 광고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혁신적인 개념입니다. 이 개념을 처음 꺼내든 잭 트라우트와 알 리스의 책 『포지셔닝』은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기획을 하는 사람들에게 바이블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죠. '사람들 마음속에 우리 브랜드를 어떻게 자리 잡게 할 것인가', '이미 고착화된 인식을 살짝 건드려서 우리 브랜드에 유리하게 만들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 '새로 태어난 우리 브랜드를 소비자 인식 속 기존 개념들과 어떻게 연결해야 가장 쉽고 강력하게 자리 잡힐까'... 저자들이 1970년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에 제시한 질문들은 21세기 현재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서 많은 브랜드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브랜드 포지셔닝 전략을 세워달라는 과제 요청은 여전히 쏟아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제 커리어를 되돌아봤을 때 가장 많이 받은 과제일지도 모르겠어요. 풀어가는 과정이 거의 자동화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팩트북을 열심히 파면서 브랜드를 공부하고, 가장 독보적이며 차별적인 에센스를 찾고, 그것을 소비자향 언어로 빚고, 경쟁자와는 거리가 먼 동시에 소비자와는 가까운 가치를 주는지 검산하는 과정. 그래서 받았을 때 제일 마음이 놓이는 과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늘 해오던 생각과 방식에 빈틈이 있는 건 아닐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좌표에 깃발을 꽂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포지셔닝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소비자 마음속에 브랜드의 위치를 잡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거의 없을 거에요. '사람들 마음속에 쉽게 들어가기 위해 우리 브랜드를 첫 번째로 인식시키는 것', '막강한 1위가 있을 때는 의도적으로 그 경쟁자의 완전한 반대편에 자리 잡게 하는 것', '매일 쏟아지는 광고 포화를 뚫을 수 있도록 극도로 단순화한 메시지 하나를 남겨놓는 것' 등등... 이 엄청난 통찰들도 쉽게 부정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고요.
그런데 저는 이 통찰들을 실무에 적용하는 과정 속에서, 한 가지 질문을 계속 품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포지셔닝의 개념의 출발은 "position + ing", 즉 "자리 잡기를 계속 해나가는 동태적 개념"으로 꺼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실무 현장에서 적용하는 포지셔닝은 다소간 "좌표 찍고 굳히기"에 머물러 버리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취향 소비라는 메가 트렌드, 1970년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포 분열하고 있는 마켓, 상황에 따라 가면을 바꿔 쓰는 멀티 페르소나 소비자들, 심지어 1등 브랜드를 회피하고 되려 니치 브랜드를 더 선호하는 기조 등 매일 변화가 계속되고 있는 환경을 바르게 직시해보건대, 포지셔닝 전략을 더 유의미하게 만들려면 단순히 '좌표 잡기, 영역 굳히기, 순위 올리기'를 넘어서, 방향과 속도를 가진 벡터vector의 개념으로 이해되고 쓰여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의 기획서나 제안서에 올려질 포지셔닝 전략을 Territory Positioning에서 Vector Positioning으로 바라보고, 논의의 축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물론 이것이 브랜드의 핵심 포지션 자체를 계속 흔들리게 만들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브랜드 포지션은 여전히 가장 독보적이며 차별적이고, 그래서 안전한 곳에 깃발을 세워야 합니다. 다만 그 깃발을 소비자가 공감하게 하는 방식이 조금 더 유동적이고 맥락에 반응하는, 그러니까 벡터에 가까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정된 자리에서 한 방향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판의 흐름을 읽으며 언제든 각도를 조정하고 힘의 강약을 조절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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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에서 발견한 벡터 포지셔닝의 힌트
그렇다면, 벡터 포지셔닝은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쉼없이 시대와 시장의 흐름을 읽고, 소비자와 같이 호흡하며 계속해서 브랜드의 포지션을 업데이트 해나가자는 것- 말로는 쉽지만, 실무에 적용하려고 하면 으레 현실적인 한계들에 부딪히게 마련입니다. 언제 어떻게 업데이트 해야 하는지 타이밍과 방법을 확실하게 가늠하기란 어려운 일이고, 예산이 의지를 따라오지 못할 수도 있고, 해오던 방식이나 오래도록 가졌던 좌표를 굳이 벗어나야 하는 명분을 설득해내지 못 할 수도 있겠죠. 또, 시시각각 변하는 트렌드를 따라가다보면 우리 브랜드의 일관성이 다치게 되고, 경쟁자들을 과도하게 의식하다보면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도 희미해지게 될 수도 있고요.
이렇게 실제 풀어갈 방법을 한참 고민하던 차에, 우연히 알고리즘에 이끌려 봤던 컨텐츠로부터 힌트 하나를 얻었습니다. 바로, 바둑 관전기였는데요.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바둑 관전기를 몰입하여 읽다보니 바둑의 논리가 포지셔닝의 논리와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바둑을 책으로만 접한 생초보인데도, 바둑에서 건질 수 있는 인사이트가 너무 명확해서 브랜드와 대조해서 생각하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둑이 '판 전체를 읽는 사고 훈련' 그리고 '끊임없이 형세와 수를 읽어 내 영역을 넓혀 나가는 게임'이라는 점에서, 벡터 포지셔닝의 첫 단서를 얻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바둑을 두는 자도, 설명하는 자도, 관전하는 자도 늘 하는 질문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텐데요, "지금 두는 이 수가 앞으로도 나를 유리하게 만들어 줄 것인가" 이 질문은 브랜드 포지셔닝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선택한 포지션이, 지금 던진 메시지가, 지금 시작한 캠페인이 다음 수를 더 쉽게 만드는가, 아니면 오히려 우리를 가두는가, 라는 질문으로 말이죠.
바둑에 대한 부연 설명을 조금만 더 해볼께요. 바둑은 궁극적으로는 '집'의 크기와 수를 겨루는 게임입니다. 집이란 무엇일까요? 내 돌로 둘러싸여 더 이상 상대가 들어올 수 없는 영역, 점수로 계산되는 나만의 공간입니다. 중요한 지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판 위에 내 돌이 많다는 건 영향력이나 힘이 있다는 뜻이지만, 실제로 그 돌들이 영역(집)을 만들지 못하면 점수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작은 집들을 여러 개 확보해서 점수는 쌓았지만 판 전체를 움직일 힘이 약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주도권과 확장성 없이 상대 돌에게 계속 끌려다니게 됩니다. 집은 있는데 다음 수가 없는 상태, 안정적이지만 답답한 상태가 되는 거죠. 마지막으로, 바둑에서 중요한 건 개별 수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지금 어떤 형세에 있는가'를 읽는 능력입니다. 같은 수라도 어떤 형세에서 두느냐에 따라 명수가 되기도 하고 악수가 되기도 하는 거죠. 어떠세요? 기본만 봐도, 브랜드 포지셔닝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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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C 챕터에서는, 바둑과 포지셔닝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전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둑에서 자주 마주치는 열 가지 케이스를 기반으로 브랜드 포지셔닝을 다시 생각해야 할 순간들, 포지셔닝에 벡터를 부여할 단초들을 정리해봤습니다. 단순히 '이렇게 하면 좋다'는 조언이 아니라, '지금 우리 브랜드가 어느 판에 서 있는지'를 스스로 가늠해보는 가이드로 삼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바둑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바둑 관전기의 느낌을 빌려와서 풀어가볼께요. 자, 그럼 첫 번째 케이스부터 들여다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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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Study : 바둑의 형세와 수읽기 케이스에서 얻은 벡터 포지셔닝 레슨
1. 한 발 물러서서 판을 보라
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큽니다. 손은 바쁘고 표정도 심각합니다. 누가 봐도 중요한 국면입니다. 하지만 고수는 잠시 멈추고 돌을 집어 들지 않은 채, 판을 그저 내려다봅니다. 그리고 질문합니다. "지금 이 싸움은 이겨야 하는 싸움인가, 그냥 일어나고 있는 싸움인가", "이 싸움을 이기면 판이 유리해지는가, 아니면 이기더라도 전체 형세는 나빠지는가" 멀리 시선을 빼고 판을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해보는 고수. 고수는 싸움이 아니라, 싸움을 바라보는 위치를 먼저 옮깁니다.
대부분의 브랜드 문제는 '못해서'가 아니라 판단의 고도가 낮아서 생깁니다. 캠페인을 돌리고, 메시지를 다듬고, 제품을 수정하는 등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정작 이 움직임이 어느 형세에 대한 대응인지는 정리되어 있지는 않았을 때 문제가 꼬이기 시작하죠. 경쟁사가 공격적인 마케팅을 시작했다고 해서 우리도 똑같이 대응해야 할까요? 트렌드가 바뀌었다고 해서 우리 메시지도 바꿔야 할까요?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판에 서 있는가. 이 대응이 단기 방어일 뿐인가, 아니면 장기 형세를 바꾸는 수인가. 벡터 포지셔닝의 출발점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우리는 어느 판에 서 있는가"를 간파하는 데에 있습니다.
2. 포석(布石) – 너무 일찍 확정하는 위험
바둑에서 포석은 말 그대로 "돌을 펼쳐 놓는다"는 뜻으로, 대국 초반에 바둑판 전체에 돌을 배치하며 판의 흐름을 잡는 과정이에요. 핵심은 지금 당장 집을 확정 짓는 것이 아니라, 큰 그림을 그리는 것에 있습니다. 어디를 내 세력권으로 만들지, 어느 쪽에서 싸움이 나면 유리할지, 상대의 확장을 어디서 막고 나는 어디서 뻗어나갈지...이런 전략적 판단을 하며 가치가 큰 곳을 먼저 차지해 주도권을 잡는 단계입니다.
바둑을 처음 보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저렇게 띄엄띄엄 두지?" "왜 바로 집을 안 만드는 거야?"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바둑의 초반, 즉 포석 단계에서 돌 하나의 가치는 '지금 당장 몇 집이 되느냐'가 아니라 '앞으로 얼마나 많은 선택지를 열어두느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수들은 초반에 집을 확정하지 않습니다. 모서리와 변, 그리고 중앙을 적절히 나누어 두면서 이 판이 빠른 싸움이 될지, 느린 운영이 될지, 어느 쪽으로 흘러가도 대응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둡니다. 너무 일찍 집을 확정하면 당장은 안정적이지만, 환경이 바뀌었을 때 움직일 공간이 사라집니다.
브랜드의 초기 포지셔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런 브랜드다"를 너무 정확하거나 좁게 정의해버리면, 그건 집을 너무 빨리 확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뷰티 스타트업이 론칭 초기에 "20대 여성을 위한 저가 화장품"이라고 포지션을 못 박아버리면, 시장이 프리미엄으로 이동하거나 남성 시장이 열릴 때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좋은 브랜드 포석은 정답을 꽂아내리기 보다 태도와 문제의식을 남기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화장을 꾸미기가 아니라 표현으로 보는 브랜드", "가격이 아니라 가치로 선택받고 싶은 브랜드" 같은 방향성 말이죠. 이렇게 포석을 두면, 이후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자연스럽게 그 방향 위에서 이어질 수 있고, 시장 변화에 따라 구체적인 포지션을 조정할 여지도 생깁니다.
3. 세력은 넓지만 집은 없는 형세
좌우로 돌이 길게 뻗어 있습니다. 상대는 쉽게 다가오지 못합니다. 판은 왠지 내가 유리한 것처럼 느껴지죠. 하지만 계가를 해보면 아직 점수가 없습니다. 이 돌들은 '가능성'이지 '소유'가 아닙니다.
바둑에는 두 종류의 자산이 있습니다. 하나는 집이고, 다른 하나는 세력입니다. 집은 이미 확보된 점수, 돌로 둘러싸여 더 이상 침범당하지 않는 공간입니다. 반면 세력은 아직 점수가 아닙니다. 하지만 상대가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고, 언젠가 집으로 바뀔 가능성을 가진 힘이죠. 둘 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세력은 공기 같아서, 적절한 타이밍에 집으로 바꾸지 못하면 그냥 사라집니다.
브랜드로 옮기면 이런 상황입니다. 인지도도 있고, 호감도도 있고, 이미지도 좋은데 선택의 순간에 브랜드 이름이 꺼내지지 않는 상황. "좋은 브랜드"라는 추상적 평판만 있을 뿐, 구체적인 구매 이유가 없는 거죠. "이 브랜드가 왜 좋지?"라고 물으면 대답할 말은 많은데, "언제 사야 하지?"라고 물으면 답이 막힌다? 이것이 바로 바로 세력은 있는데 집은 없는 상황입니다.
실제로도 SNS에서는 반응이 좋고, 설문조사에서는 호감도가 높은데, 정작 매출은 정체되어 있는 브랜드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광고를 늘려도, 콘텐츠를 더 만들어도 전환율은 오르지 않는 막막한 형세 속에 갇혀버린 거죠. 문제는 인지도가 아니라 '집'이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인식, 이미지, 세계관은 세력입니다. 당장은 숫자로 안 보이지만, 시장에서 중요한 힘을 만듭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세력을 집으로 바꾸지 못하면 "멋있지만 안 사는 브랜드"가 됩니다.
여기서 필요한 건 브랜드를 더 알리는 게 아닙니다. "비 오는 날 신는 신발", "새벽에 마시는 커피", "회의 전에 꺼내는 노트" 같은, 상황과 브랜드를 직접 연결하는 고리가 필요합니다. 세력을 집으로 바꾸려면, 소비자의 일상 속 특정한 니즈 순간에 우리 브랜드가 필요한 이유를 세워야 합니다. 두번째 노트에서 다루었던 FFR 개념과도 연결이 되죠.
바둑 고수의 전략은 단순합니다. 세력을 쌓는 순간부터 이걸 어디서 집으로 바꿀 것인가를 계산합니다. 포지셔닝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순간을 낚아채서 행동과 구매로 이어지게 할지 이미 설계되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세력을 쌓아오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집 하나 꽉 움켜쥘 계산이 서 있는 포지셔닝, 그것이 벡터 포지셔닝입니다.
4. 집은 있지만 판이 막힌 형세
모서리에 단단한 집이 있습니다. 안정적입니다. 당장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돌을 들고 보니 둘 곳이 없습니다. 판은 조용한데, 불안합니다. 집은 지켰지만 길을 잃은 형세입니다.
이 단계의 브랜드는 "잘 팔리는 이유"는 말할 수 있지만, "앞으로 왜 존재해야 하는지"는 흐릿합니다. 예를 들어 "가성비 좋은 브랜드"로 자리 잡았는데, 시장이 프리미엄으로 이동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과거의 성공 공식을 버리자니 위험하고, 그대로 가자니 미래가 없습니다. 포지셔닝이 과거의 성공 조건에 묶여 있을 때, 브랜드는 스스로를 방어하느라 다음 수를 두지 못합니다.
실제로 이런 브랜드들의 회의에 들어가 보면, 대부분의 논의가 "어떻게 지금 것을 지킬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시장 점유율을 어떻게 방어할까, 경쟁사 공세에 어떻게 대응할까. 하지만 정작 "우리가 왜 여전히 필요한가"에 대한 새로운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안정적"이라는 것은 오히려 시장이 변하고 있는데 우리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5. 두터움 – 공격하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는 상태
바둑에서 두터움이란 약점이 없고, 건드릴수록 손해가 나는 견실한 구조를 뜻합니다. 두터운 돌을 가지고 있으면 공격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대가 먼저 피합니다. 괜히 손을 대면 자기 돌이 위험해지기 때문이죠.
그리고 중요한 건, 두터움이 있으면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공격할 때도 안전하고, 방어할 때도 여유롭습니다. 상황에 따라 빠르게 움직이거나 천천히 운영하거나, 왼쪽으로 갈 수도 오른쪽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두터움은 자유입니다. 반대로 두터움이 없으면, 아무리 공격적으로 나가도 금방 무너지고, 조금만 건드려도 전체가 흔들립니다.
브랜드의 두터움도 같습니다. 목소리가 크지 않아도, 설명이 길지 않아도, 굳이 경쟁사를 언급하지 않아도 소비자가 자연스럽게 납득하는 상태. 그리고 이런 브랜드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메시지를 조정할 여유도 가집니다. 한 달은 감성적으로, 다음 달은 기능적으로 말해도 브랜드가 흔들리지 않고, 젊은 층에게는 한 가지 톤으로, 중장년층에게는 다른 톤으로 말해도 일관성이 깨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심축이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두터움은 말하는 방식, 행동, 제품 경험, 침묵하는 순간까지 모두 같은 기준에서 나올 때 생깁니다. 그 기준이 명확하면 표현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포지션(중심)은 고정하되, 소통(방향과 강도)은 살아 움직이는 것, 벡터 포지셔닝의 기본입니다.
6. 선수와 후수의 차이
흑돌이 한 수를 둡니다. 백돌이 바로 응수합니다. 흑돌이 다시 한 수를 둡니다. 백돌도 다시 응수를 고민합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흐름이 만들어집니다.
선수란 이기는 수가 아니라, 상대를 바쁘게 만드는 수입니다. 이 한 수를 두면, 다음 수의 주도권까지 자연스럽게 따라오죠. 후수는 반대입니다. 상대의 질문에 답만 하는 상태. 계속 두지만, 판은 내 것이 아닙니다.
브랜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던진 질문에 시장이 반응하고 있는가, 아니면 경쟁사의 메시지에 우리가 답하고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애플이 "1000곡을 주머니에"라고 말했을 때, 다른 MP3 플레이어 브랜드들은 "우리도 용량 크다"고 대응해야 했었죠. 테슬라가 "전기차는 빠르고 멋지다"고 정의했을 때, 기존 자동차 회사들은 그 기준 안에서 자기 전기차를 설명해야 했습니다.
선수 브랜드는 정의를 만듭니다. "무엇이 좋은가"를 먼저 말합니다. 그러면 경쟁사는 그 정의 안에서 설명하거나 반박해야 합니다. 후수 브랜드는 늘 해명합니다. "우리는 그런 브랜드가 아닙니다." "오해가 있습니다." .. 안타깝지만 이미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입니다.
고수 브랜드는 모든 이슈에 반응하지도 않습니다. 침묵조차 선수일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괜히 받아주지 않아도 되는 수를 받는 순간, 판의 중심은 상대에게 넘어갑니다. 항상 대응하기 위해 설명하고 있다면 후수, 시장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면 선수입니다. 벡터 포지셔닝은 선수를 지향해야 합니다.
7. 자충수의 순간
불안합니다. 상대가 들어올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막고 또 막습니다. 돌은 많아졌는데 숨 쉴 곳이 없습니다. 상대보다 내가 먼저 답답해집니다.
브랜드도 그렇습니다. 비판이 나오면 해명하고, 오해가 생기면 설명을 덧붙입니다. "저희는 그런 브랜드가 아닙니다", "오해입니다", "사실은 이렇습니다"... 브랜드는 점점 친절해지지만 기억되지는 않습니다.
자충수 브랜드의 특징은 명확합니다. 메시지가 길어집니다. 한 문장으로 설명하던 것이 세 문장이 되고, 세 문장이 한 단락이 됩니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핵심은 흐려집니다. 모든 오해를 없애려고 하는 순간, 정작 기억되어야 할 한 가지도 사라집니다. 이런 대응은 벡터 포지셔닝도 뭣도 아니고, 그저 브랜드 포지셔닝이 근본적으로 망하게 되는 지름길입니다.
8. 악수는 틀린 생각이 아니라 틀린 타이밍이다
지금은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런데 괜히 공격을 한번 해봅니다. 수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문제는 지금 둘 수가 아니라는 것일뿐.
브랜드도 마찬가지입니다. 포지셔닝이 흐려진 상황임을 알면서도 약간 흐린 눈을 하고 "바이럴 캠페인 하나만 잘 터뜨리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브랜드 정체성이 아직 불명확한데 "일단 인플루언서 마케팅부터 시작하자"고 합니다. 그 전술들이 나쁜 건 아닙니다. 하지만 브랜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술을 먼저 쓰면, 주목은 받을지 몰라도 기억되기는 어렵습니다. 전략의 실패는 대부분 잘못 판단한 타이밍의 실패입니다.
9. 무리수는 희망의 잘못된 이름이다
저기만 가면 판이 뒤집힐 것 같습니다. 그래서 뛰어듭니다. 하지만 내 돌들은 아직 서로 연결도 되어있지 않습니다. 구조 없는 도약입니다.
아직 품질에 대한 신뢰가 쌓이지 않았는데 가격을 두 배로 올리거나, 아직 브랜드 경험이 일관되지 않았는데 새 카테고리로 확장하는 등 무리수는 대개 "지금 이 위치가 불편해서" 나옵니다. 중저가 브랜드로 인식되는 게 답답해서, 한정된 카테고리에 갇힌 게 답답해서 급하게 점프를 시도해보는거죠.
하지만 불편함은 돌파해야 할 신호이지, 건너뛰라는 신호는 아닙니다. 프리미엄으로 가고 싶다면 먼저 프리미엄을 정당화할 이유를 쌓아야 하고, 확장하고 싶다면 먼저 지금 영역에서의 신뢰를 확고히 해야 합니다. 무리수가 주는 레슨은, 벡터 포지셔닝을 해야 한다고 해서 무작정 근본없는 방향성을 찾아나서면 안 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10. 버림은 패배가 아니라 설계다
작은 집 하나를 포기합니다. 처음엔 손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판을 다시 보면 상대 돌이 약해져 있습니다. 다음 수가 쉬워졌습니다. 버림은 패배가 아닙니다. 오히려, 작은 것을 버리고 큰 형세를 선택하겠다는 선언입니다.
바둑에서 가장 어려운 수는 묘수가 아니라 버림입니다. 이미 투자한 돌, 살릴 수 있을 것 같은 돌을 형세를 위해 과감히 포기하는 것. 이건 실력보다 용기의 문제이고, 어떻게 보면 벡터 포지셔닝의 궁극입니다.
"20대부터 60대까지 모두를 위한 브랜드"라는 욕심을 버리고, "30대 워킹맘"에게만 집중하기로 하는 것, "모든 상황에 어울리는 제품"이라는 주장을 버리고, "출근길 아침"이라는 한 장면만 선점하기로 하는 것은 당장은 잠재 고객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는 결정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입니다. 모두에게 어필하려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던 상태에서, 이제 특정한 누군가에게는 확실하게 기억되는 상태로 바뀝니다. 버림은 축소가 아니라, 집중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선택입니다.
강한 브랜드는 포기한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고객은 타깃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장을 완성할 수 있다면, 그 브랜드의 포지셔닝은 견고합니다.
브랜드에서도 버림은 늘 아픕니다. 매출이 나오는 채널, 반응이 좋은 메시지, 오래 겨냥해온 타깃 등등.. 하지만 이들이 포지셔닝을 흐리기 시작하면 그때는 버리지 않으면 판 전체가 무너집니다. 고수의 질문을 한번 따라가 보세요. "이걸 붙잡고 있어서 우리가 두지 못하는 다음 수는 무엇인지를."
포지셔닝은 좌표가 아니라 벡터다
바둑은 한 수로 이기는 게임이 아닙니다. 형세를 읽고, 무너지지 않는 수를 끝까지 반복하는 게임이죠. 브랜드 포지셔닝도 같습니다. 대단한 한 문장보다, 지속 가능한 판을 만드는 사고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판은 고정된 좌표가 아니라, 시장의 흐름과 경쟁의 형세에 따라 방향과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벡터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포지션은 고정하되, 소통은 살아 움직여야 하고, 깃발은 한곳에 꽂되 그 깃발을 중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움직일지는 끊임없이 계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벡터 포지셔닝에 대한 고민의 끝은 늘 이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수를 두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전체 판이 보일 때, 비로소 지금 둘 수가 보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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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셔닝에 벡터를 부여하는 가장 빠르고 강력한 방법
Persona Positioning: 소비자들의 Multi Persona와 호흡하라
앞의 논의에서는 벡터 포지셔닝을 어느 타이밍에 결정 해야 하고, 어떤 수를 읽어가며 해야 하는지 바둑에 빗대어 이야기해보았습니다. P 챕터에서는, 벡터 포지셔닝을 실무에 가장 빠르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실제 사례를 통해 논의해보려고 합니다.
한 브랜드의 포지션이 고정된 좌표가 아니라 소비자 혹은 경쟁자와의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게 하는 것. 이것을 벡터 포지셔닝이라고 규정하고 보니까, 이것을 이미 너무 잘하고 있는 일본 백화점 브랜드들의 레전드 카피 각축전이 바로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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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백화점 포지셔닝을 해야 한다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백화점 안에 들어가는 상품과 서비스는 대동소이 합니다. 특정 명품 브랜드를 품었냐 아니냐, 트렌디한 팝업을 자주 여느냐 아니냐 정도가 다를 수 있겠죠. 포지셔닝의 첫 출발점은 본디 우리만의 차별점을 찾는 것인데, 백화점의 경우는 차별점을 내세워 포지셔닝을 하면 어쩐지 스스로 입지를 좁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꽤나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런데 여기 일본 10개 백화점의 대표적인 헤드 카피들을 한번 보세요.
(*어떤 카피는 TVCM/포스터 속 헤드라인이고, 어떤 카피는 브랜드의 대표 슬로건이라 위계와 쓰임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주요 골자를 캐치하는 데엔 무리가 없어서 같이 배치했습니다)
이와타야: "아주 오래전에 드린 것을, 엄마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PARCO: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을 사랑해줍니까?" 이세탄: "사랑을 몇 년, 쉬었습니까?" 세이부: "신기해, 너무 좋아." 다카시마야: "변하지 않는데도, 새롭다." 미츠코시: "훈장/포장 시즌이네요. 미츠코시에 맡겨주세요." 다이마루: "가는 길도 다이마루, 오는 길도 다이마루." 마루이: "아빠와 딸이 데이트할 수 있는 곳. 엄마와 딸이 친구가 되는 곳." 한큐 우메다: "세상에, 놀이 정신을." 루미네: "울고 싶어지면, 얼른 옷을 갈아입는다."
자신이 누구이고 뭘 제공해줄 수 있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하기 보다, 소비자와 같이 호흡하고 경쟁자와는 다른 가치를 주면서 어떤 영역을 가져 가려고 하는지를 잘 깎인 한 줄로 보여주잖아요. 좌표를 꽂은 곳이 어디인지 감각적으로 와닿는데, 동시에 어느 순간 변심해버릴 마음까지도 품을 수 있는 큰 그릇을 가진 카피. 그리고 각자 소비자 삶 속 서로 다른 순간과 가치를 선점하면서 소비자 가슴 속으로 살아 들어가 움직이는 실전 벡터 포지셔닝 메시지 그 자체들. 너무 멋있고, 당장 가고 싶어집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볼까요?
이와타야, "아주 오래전에 드린 것을, 엄마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부모님 얼굴이 떠오릅니다. 오래전에 드린 선물을 지금도 간직하고 계신 모습... 이와타야는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 남을 선물"을 살 수 있는 곳입니다. 부모님을 위한 선물, 오래 기억될 선물이 필요할 때, 이와타야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관계를 증명하는 선물을 사는 거죠.
PARCO,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을 사랑해줍니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 됩니다. 연애에서, 일에서, 관계에서 끌려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주체적인 내가 될 수는 없는거야? PARCO는 "내 기준으로 선택하는 삶"을 파는 곳입니다.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내 취향으로 옷을 고르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나를 만나고 싶을 때, PARCO에 갑니다.
이세탄, "사랑을 몇 년, 쉬었습니까?"
멈춰있던 나, 감각을 놓고 있던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일에 치이고, 관계에 익숙해지고, 어느새 나를 돌보지 않았던 시간들. 이세탄은 "멈췄던 나를 다시 시작하는 곳"입니다. 새로운 옷을 입는다는 건 단순히 옷을 바꾸는 게 아니라, 나를 다시 주인공으로 세우는 행위입니다. 다시 나를 가꾸고 싶을 때, 이세탄에 가야겠습니다.
세이부, "신기해, 너무 좋아."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 느껴집니다. 왜 좋은지 모르겠는데 그냥 좋은 것, 합리적으로 따지지 않고 감각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순간. 세이부는 "이유 없이 좋은 것을 만나는 곳"입니다. 호기심에 이끌려 새로운 걸 발견하고 싶을 때, 논리가 아니라 감각으로 고르고 싶을 때, 세이부에 가게 될 것 같아요.
다카시마야, "변하지 않는데도, 새롭다."
격이 다른 무언가가 떠오릅니다. 낡은 고급이 아니라, 오래된 신뢰가 현재와 만나는 품격입니다. 다카시마야는 "시간이 증명한 선택"을 파는 곳입니다. 실수하면 안 되는 순간, 품격이 필요한 자리, 오래 써도 좋은 물건이 필요할 때, 다카시마야에 가야겠네요.
미츠코시, "훈장/포장 시즌이네요. 미츠코시에 맡겨주세요."
믿고 맡길 수 있는 존재라는 느낌이 듭니다. 훈장을 받는 날, 중요한 사람에게 선물하는 날, 예를 갖춰야 하는 자리. 미츠코시는 "선택의 부담을 덜어주는 곳"입니다.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지만 실수를 하면 안 되는 때, 그냥 미츠코시에 맡기면 됩니다. 안심이 필요한 순간, 고민할 필요 없이 미츠코시입니다.
다이마루, "가는 길도 다이마루, 오는 길도 다이마루."
일본에 가보신 적이 있다면 다이마루 백화점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떠오르실 겁니다. 삿포로역 앞에, 오사카 우메다역 안 등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죠. 특별한 날이 아니라 그냥 지나는 길, 출근길, 퇴근길, 약속 전후와 같이 다이마루는 "일상 속에 있는 곳"입니다. 목적지가 아니라 습관입니다. 특별히 뭘 사러 가는 게 아니라, 그냥 지나다 들러서 필요한 걸 사는 곳. 다이마루는 내 동선 안에 있습니다.
마루이, "아빠와 딸이 데이트할 수 있는 곳. 엄마와 딸이 친구가 되는 곳."
새로운 관계가 떠오릅니다. 아빠와 딸이 데이트를 한다는 것, 엄마와 딸이 친구가 된다는 것, 고정된 역할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만나는 가족. 마루이는 "관계를 새롭게 만드는 곳"입니다. 부모와 아이라는 관계를 넘어 친구가 되고 싶을때, 혹은 동창생이라는 관계를 넘어 연인 관계가 되고 싶을 때 마루이가 좋은 선택이겠죠.
한큐 우메다, "세상에, 놀이 정신을."
다카시마야나 미츠코시와는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것 같죠? 가벼운 즐거움이 떠오릅니다. 품격이나 격식은 모르겠고, 그냥 즐겁게 돌아다니는 곳. 한큐는 "쇼핑이 놀이가 되는 곳"입니다. 무겁게 고민하지 않고, 가볍게 구경하고, 재미있게 발견하는 경험. 그저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한큐에 가면 됩니다.
루미네, "울고 싶어지면, 얼른 옷을 갈아입는다."
이제 막 스무살이 된 여자아이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녀는 감정을 오래 묵히지 않고 행동으로 얼른얼른 바꿔내죠. 울고 싶을 때 울지 말고 옷을 갈아입으라는 것, 감정에 머물지 말고 움직이라는 것. 루미네는 "변화를 시작하는 곳"입니다. 슬픔을 행동으로 전환하고, 멈춰있던 나를 다시 움직이고 싶다면, 루미네입니다.
보이시나요? 어떤 브랜드도 '일본 제1의 매출 백화점이다', '우리가 글로벌 유통의 최전선에 있다', '유행 일번지다' 등 일차원적 포지션을 선언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오래 품고 싶은 선물, 주체적인 나, 다시 시작, 감각적 발견, 품격 있는 선택, 격식 있는 순간, 일상의 편의, 새로운 관계, 가벼운 즐거움, 감정의 전환 등 소비자 삶 속 서로 다른 순간과 가치를 선점하고 있죠. 그 순간은 고정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오늘 이 지면에서 다 다루지는 못하지만 시즌에 따라, 나이에 따라, 상황에 따라 조금씩 변주를 해나갑니다. 중심은 같은 곳에 두되, 조금씩 다른 장면scene으로 확장해서 보여주는 것, 이것이 벡터 포지셔닝의 핵심이자 실전으로 나아가게 해줄 가장 좋은 가이드인 것 같아요. 깃발은 한 곳에 꽂되, 그 깃발이 가리키는 삶의 장면은 끊임없이 확장되는 것 말이죠.
이 사례들을 벡터 포지셔닝의 사례로 들고 싶었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 백화점 카피들을 잘 읽다보면 내 내면의 다양한 페르소나를 일깨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 때까지 수없이 많은 '나'를 살아갑니다. 회의실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의 나, 퇴근길 지하철에서 SNS를 보는 나, 주말 아침 부모님께 전화를 거는 나, 친구와 술을 마시며 고민을 털어놓는 나. 같은 사람이지만, 각 순간마다 다른 감정, 다른 니즈, 다른 가치가 작동합니다. 파르코가 가고 싶은 날이 있고, 이와타야에 가야 하는 날이 있고... 또 이세탄이 필요한 순간이 있고, 루미네를 찾게 되는 기분이 있잖아요. 이건 브랜드가 여러 개여서가 아니라, 내가 여러 명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포지셔닝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브랜드는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브랜드입니다." 하지만 이건 일차원적인 매칭입니다. "30대 워킹맘"이라는 고정된 정체성과 "워킹맘을 위한 브랜드"라는 고정된 포지션이 만나는 것, 평면 위의 한 점에 좌표를 찍는 방식이죠. 하지만 벡터 포지셔닝은 다르게 접근합니다. "지금 당신은 어떤 순간을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브랜드는 말합니다. "당신의 이런 순간에,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라고 말이죠.
아까와 같은 30대 워킹맘을 다시 떠올려 볼께요.
- 부모님 생신 전날에는 "시간이 지나도 남는 선물"이 필요하니까 → 이와타야
- 회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겪었다면 "이것만은 내 기준으로 선택"하도록 → PARCO
- 육아와 일에 치여 나를 잃었다면, "멈췄던 나를 다시 시작"해봐 → 이세탄
- 중요한 미팅 전날에는 "품격 있는 선택"이 필요하니까 → 다카시마야
- 퇴근길에는 그냥 "일상의 편의"만 누리겠습니다 → 다이마루
같은 사람이 같은 카테고리를 바라보는 데도 순간마다 다른 페르소나가 작동하고, 각 페르소나마다 다른 브랜드를 부릅니다. 이게 바로 벡터 포지셔닝이 멀티 페르소나 시대, 멀티 니즈 시대에 필수적인 이유입니다. 브랜드가 "우리는 워킹맘을 위한 브랜드"라고 고정된 타깃을 향하는 포지셔닝을 선언하는 순간, 그 브랜드는 워킹맘의 수많은 순간 중 아주 일부만 커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부모님을 생각하는 순간"이라는 상황과 감정과 시간의 결을 선점하면, 워킹맘뿐 아니라 20대 직장인도, 40대 남성도, 그 순간에는 이와타야를 찾게 됩니다.
이상의 논의들로 봤을 때 벡터 포지셔닝은 (1)타깃이 아니라 순간을 선점하고, (2)인구통계가 아니라 감정 상태를 기준으로 움직이고, (3)고정된 페르소나가 아니라 유동하는 모드를 따라갈때 만들어지고 강력해진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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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들 마음 속에서 계속 살아 움직이는 포지셔닝, 판과 형세를 읽어서 두툼한 집도 구축하고 영향력도 구가하게 해주는 포지셔닝, 그런 포지셔닝의 개념으로 오늘 "벡터 포지셔닝"이라는 워딩을 처음 꺼내보았습니다.
요약해보자면, 방향(누구를 향하는가)과 크기(얼마나 강하게)를 가진 개념, 소비자의 멀티 페르소나에 맞춰 브랜드도 같은 축 위에서 방향과 크기를 조정하며 호흡하는 것, 고정된 좌표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관계를 지향하는 것. 이것이 요즘 시대를 잘 통과하게 해줄, 살아 움직이는 벡터 포지셔닝의 정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도 길어졌네요. 제가 좋아하는 브랜드들을 떠올리며, 조금이라도 더 손에 잡히는 팁을 드리고 싶은 마음을 담아 썼습니다. 좋았던 내용, 아쉬웠던 부분이 있다면 아낌없이 들려주세요. 다음 회차에서도 알찬 내용을 들고 돌아오겠습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ositively yours,
이나연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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