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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호에서는 브랜드의 팬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 13호 '브랜드와 팬' 보기). 팬은 브랜드가 의도적으로 모집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팬이 스스로 마음을 먹을 때 만들어지는 것이고, 브랜드가 할 수 있는 건 그 문턱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놓는 일뿐이라는 이야기가 주요 골자였었지요. 오늘 14호에서는, '팬'보다 한 걸음 더 깊이 그 세계로 파고 들어가 하나의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덕후'라는 단어, 한번쯤 들어보셨지요? 일본어 오타쿠에서 비롯된 단어인 덕후는, 한때는 어딘가 부정적인 뉘앙스로 받아들여졌었지만 요즘은 다른 맥락으로 읽히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저 커피 덕후예요", "러닝 덕후입니다", "시계 덕후거든요" — 사람들이 자기 입으로 덕후라고 말하는 시대가 된 거죠. 좋아하는 것에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하나의 자랑스러운 정체성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브랜드 전략을 기획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덕후라는 존재는 팬과 상당히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팬은 브랜드의 편이지만 덕후는 브랜드의 심사위원에 가깝고, 팬이 떠나는 건 관계의 문제이지만, 덕후가 떠나는 건 제품/브랜드의 문제라는 점을 몇 차례고 지켜봐왔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14호에서는 이 차이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보려 합니다. 덕후란 정확히 무엇이고, 팬과는 무엇이 다르며, 브랜드는 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그리고 덕후가 존재하는 카테고리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Chapter B
Beyond Fandom: 팬과 덕후의 결정적 차이흔히들 덕후를 열성적인 팬의 상위 버전 정도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보면, 이 두 존재는 꽤 다른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여러분 혹시 잡지 에디터 박찬용 님을 아시나요? 한때 <에스콰이어><매거진 B>의 에디터였고, <요즘 브랜드><첫 집 연대기>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하며, 폴인 매거진에도 자주 등장하시는 박찬용 에디터님은 시계 덕후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유심히 지켜봐왔던 포인트는, 박 에디터님이 '특정 시계 브랜드의 팬'은 아니더라는 점이었어요. 롤렉스도, 오메가도, 파텍필립도 그에게는 하나의 관찰 대상일 뿐, 몰입하는 건 브랜드가 아니라 '시계'라는 카테고리 자체더라고요. 무브먼트의 역사를 파고, 케이스 소재의 변천을 추적하고, 다이얼 디자인의 계보를 읽는 것. 어떤 브랜드든 좋으면 칭찬하고, 아쉬운 점이 있으면 지적하는 박 에디터님의 글을 읽으면 나도 시계 전문가가 된 느낌이 들면서, 어떤 브랜드를 골라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기까지 합니다. 저는 이것이 팬과 덕후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팬은 "이 브랜드가 좋아"라는 태도를 가지지만, 덕후는 "이 분야가 좋아"라는 태도를 가진다는 것, 팬의 감정은 브랜드를 향하지만, 덕후의 감정은 카테고리를 향한다는 것 말입니다. 이 차이는 말로 하면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로 만들어내는 결과의 차이는 상당합니다. 하나씩 살펴볼게요. 첫째, 충성의 대상이 다릅니다. 팬은 브랜드에 충성합니다. 그래서 브랜드가 실수를 해도 한 번 더 기회를 줍니다. 하지만 덕후는 브랜드가 아니라 카테고리에 충성합니다. 우리 브랜드가 카테고리의 기준에 못 미치면 가차 없이 다른 브랜드로 떠나고, 반대로 경쟁사 제품이라도 좋으면 거리낌 없이 칭찬합니다. 변심이 아닙니다. 덕후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행동입니다. 둘째, 지식의 깊이가 다릅니다. 팬은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반면, 덕후는 전문적으로 몰입합니다. 팬은 "이 제품 좋다"라고 감상하지만, 덕후는 "이 제품의 어떤 부분이 왜 좋고, 어떤 부분은 전작 대비 후퇴했으며, 경쟁사의 어떤 제품과 비교했을 때 이런 장단점이 있다"고 분석합니다. 놀라운 점은, 많은 경우 덕후가 브랜드의 담당자보다 해당 카테고리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브랜드와의 관계에서 맡는 역할이 다릅니다. 팬은 응원합니다. 브랜드의 편에서 함께 기뻐해주고 힘들 때 남아주는 사람이죠. 하지만 덕후는 심사합니다. 카테고리의 기준을 갖고 있고, 그 기준에 비추어 브랜드를 평가합니다. 신제품이 나올 때를 상상해볼까요. 이를테면 애플 아이폰의 신제품 혹은, 레전드 작가의 새 드라마. 팬은 기대감에 잔뜩 어깨를 높이며 기다리지만, 덕후는 먹이감을 마주한 맹수처럼 몸을 낮추고 대기합니다. 이 차이, 와닿으시는지요?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브랜드는 덕후를 팬처럼 대하는 실수를 하게 되고, 그 실수는 꽤 비싼 값을 치르게 됩니다. 넷째, 만들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13호에서 팬은 "모집하는 게 아니라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팬이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은 브랜드가 어느 정도 조성할 수 있습니다. 기대를 넘어서고, 호명하고, 소속감을 느끼게 하면 팬은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니까요. 그런데 덕후는 이와 다릅니다. 덕후는 브랜드가 만들어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카테고리에 대한 개인의 몰입에서 스스로 태어나야 하는 거니까요. 브랜드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단 하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덕후를 알아보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알아보기 어려운, 만들 수도 없는, 심지어 우리 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 사람들을 대체 왜 신경 써야 하는 걸까요?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덕후가 존재하는 카테고리는 성장하고, 덕후가 없는 카테고리는 정체하기 때문입니다. 케이스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Chapter C
Cases: 덕후가 바꾼 네 개의 시장Case Study 01
무신사 — 덕후 커뮤니티가 하나의 시장을 재편하다
무신사의 시작을 알고 계시나요? '무진장 신발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2001년, 스니커즈 덕후들이 모여 만든 온라인 커뮤니티가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들은 한정판 스니커즈의 발매 정보를 공유하고, 착용 사진을 올리고, 진품과 가품을 감별하는 노하우를 쌓아갔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어요. 좋아서, 그냥 재미있어서 한 겁니다. 흥미로운 건, 이 커뮤니티에 쌓인 콘텐츠와 신뢰가 자연스럽게 커머스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덕후들이 "이건 진짜 좋다"고 인정한 브랜드가 입점하게 되고, 덕후들의 코디 사진이 다른 소비자들의 스타일 가이드가 되고, 덕후들의 리뷰가 구매 결정을 좌우하게 된 것이죠. 스니커즈 덕후들의 커뮤니티가 패션 플랫폼으로 성장하고, 그 플랫폼이 한국 패션 유통의 판 자체를 바꿔버린 겁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무신사가 덕후를 "만든"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스니커즈 덕후는 무신사가 생기기 전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무신사가 한 건 그들이 이미 자발적으로 하고 있던 일 — 정보를 공유하고, 리뷰를 쓰고, 진품을 감별하는 일 — 에 장(場)을 깔아준 것뿐이었습니다. 덕후들의 자발적 활동이 플랫폼의 핵심 자산이 되었고, 그 자산 위에서 비즈니스가 자라난 거죠. 2024년 기준 무신사의 기업가치는 수조 원대에 이릅니다. 스니커즈 덕후 커뮤니티에서 시작된 여정이, 참 먼 곳까지 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Case Study 02
오늘의집 — 덕후가 카테고리를 키우고, 브랜드가 공간으로 보답하다
"인테리어는 전문가가 하는 것"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돈이 많거나, 전문 지식이 있거나, 최소한 시공 업체를 알거나. 일반인이 자기 손으로 집을 꾸민다는 건 꽤 높은 문턱이 있는 일이었죠. 그 문턱을 낮춘 건 인테리어 덕후들이었습니다. 자기 집 사진을 찍어 올리고, 어떤 제품을 어디에서 샀고,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태그하고, 시공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심지어 실패담까지 아낌없이 공유하는 사람들. 오늘의집은 바로 이 수고로움을 마다않고 열과 성을 다해 해온 덕후들의 콘텐츠 위에서 자랐습니다. 덕후들이 올린 사진이 다른 소비자들의 구매 가이드가 되고, 덕후들의 리뷰가 제품 검증의 역할을 하고, 덕후들의 노하우가 인테리어라는 카테고리 자체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결과를 만들어낸 겁니다. 그리고 오늘의집은 이 덕후들을 더 가슴뛰게 만들 방법도 알고 있었습니다. 서울 북촌에 '오픈하우스'라는 오프라인 공간을 열어, 그동안 온라인에서 활동하던 덕후들의 인테리어를 실물로 구현해서 보여주었거든요. "당신들의 콘텐츠 덕분에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를 말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으로 보여준 셈이죠. 그 공간을 통해 덕후를 리스펙트하는 동시에 또 다른 덕후들을 불러올 수도 있었을 테니, 참으로 스마트한 덕후 공략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Case Study 03
철도 덕후 — 시장을 만들고, 지키고, 국경을 넘는다
일본의 철도 덕후는 '카테고리 덕후'의 원형이라 불러도 좋을 만한 존재들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까지 세분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타는 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 촬영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열차 소리를 수집하는 사람, 시각표를 분석하는 사람.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서도 몰입의 결이 이렇게까지 나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팬과 덕후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덕후들이 만들어낸 시장 중 하나가 '에키벤'입니다. 역에서 파는 도시락을 말하는데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이 문화의 핵심은, 각 지역의 특산물로 만든 도시락을 그 역에서만 살 수 있다는 한정성에 있습니다. 고베역에서는 소불고기, 도야마역에서는 송어회 도시락을 살 수 있는 식이죠. 에키벤을 전국적으로 수집하고 평가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덕후 놀이가 되었고, 이 놀이가 지방 소도시의 관광 경제를 실질적으로 지탱하고 있습니다. 덕후는 시장을 만들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사라질 위기에 놓인 것을 지키기도 합니다. 일본 지바현의 쵸시전철이 딱 그런 경우예요. 1922년에 창업한 이 회사는 쵸시역에서 도카와역까지 6.4km 노선 하나가 전부인 아주 작은 철도회사입니다. 자가용 보급에 밀리고, 버블 붕괴에 휘청이고, 횡령 사건까지 터지면서 수차례 폐업 직전까지 몰렸는데요 — 그때마다 이 회사를 살려낸 건 투자자도, 정부 보조금도 아닌, 철도 덕후들이었습니다. 살려낸 방식이 또 걸작입니다. 2006년, "열차 수리비를 벌어야 합니다"라는 절박한 공지가 홈페이지에 올라오자, 역무원들이 직접 간장맛 센베이를 구워 팔기 시작합니다. 과자가 의외로 반응이 좋았어요. 급기야 회사는 식품판매업에 등록을 하게 되고, 스스로를 "열차를 몰기 위해 과자를 파는 회사"라고 소개하기에 이릅니다. 나중에는 인기 과자 '우마이봉'을 패러디해서 '마즈이봉(맛없봉)'까지 출시했는데, '마즈이'는 일본어로 "맛없다"와 "상황이 안 좋다"를 동시에 뜻한다고 해요. 일부러 곰팡이 무늬까지 새겨 넣었다는데, 이건 숯불 닭고기 맛이 나는 멀쩡한 과자입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코로나로 승객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선로에 깔려 있던 돌멩이를 통조림으로 만들어 팔았는데, 품절. 침목을 고정하던 못으로 만든 병따개도 품절. 사장이 직접 출연하는 유튜브 채널에서는 "이대로 가면 경영 파탄이 확실합니다"라고 자학 개그를 하면서 구독자 4만을 모았고, 회사가 직접 제작한 C급 영화 '열차를 멈추지 마라'에는 덕후들이 크라우드 펀딩으로 5,000만 원을 보태기까지 했습니다. 돌멩이 통조림을 사고, C급 영화에 돈을 보태는 건 어떤 합리적 소비 기준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행동이죠. 하지만 "이 철도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안 된다"는 덕후의 신념 앞에서는, 돌멩이도 기꺼이 소장할 가치가 있는 물건이 됩니다. 당시 사장이었던 다케모토 가쓰노리 역시 세무사 출신의 철도 덕후로, "어떻게든 열차를 지키고 싶다"며 직접 운전 자격증까지 따서 운전대를 잡았었다고 합니다. 열차를 몰기 위해 과자를 굽고, 돌을 팔고, 영화를 찍고, 끝내 운전대까지 잡은 사람들의 이야기. 이것이 덕후가 카테고리를 지키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덕후의 힘은 국경도 넘습니다. 2019년, 한국 지하철역 이름이 적힌 열쇠고리가 일본인 관광객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명동관광정보센터 기준 월 1,500~2,000개가 판매되었는데, 구매자의 60~70%가 일본인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의 팬도, 서울 지하철의 팬도 아닙니다. 그저 '철도'라는 카테고리의 덕후라는 이유로 국경까지 넘어온 것입니다. 수요가 늘면서 열쇠고리 종류는 처음 15개역에서 80개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2026년 1월에는 코레일이 역명판 디자인의 레일플러스 교통카드를 출시했는데, 30개역 중 11개역이 출시 당일 매진되었고, 한 덕후는 하루 반나절 만에 청량리에서 천안아산까지 5개역을 돌며 카드를 수집했다고 합니다. 돌이켜보면, 덕후가 없었다면 에키벤도, 역명판 카드도, 열쇠고리도, 쵸시전철의 생존도 없었을 겁니다. 일반 소비자를 위한 상품이 아닌 것들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 그 자체가 덕후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Case Study 04
용산 도파민스테이션 — 덕후를 알아본 공간이 만들어낸 역전극
용산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한때 IT 산업의 메카이자 전자상가의 성지였지만, 온라인 쇼핑에 밀려 쇠락한 이미지가 강했던 곳이죠. HDC아이파크몰은 이 쇠락한 이미지 속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읽어냈습니다. "용산에는 여전히 덕후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파크몰 영업본부장의 말에 따르면, "용산은 게임과 캐릭터 굿즈, 캠핑 같은 취미 콘텐트를 찾는 이른바 '덕후'들의 성지로 인식돼 있었다"고 합니다. 핵심적인 판단은, 이 인식을 약점이 아니라 자산으로 바라본 데 있었습니다. 덕후가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한데 모아 집결시키면, 전국에서 사람이 찾아올 것이라고 본 거죠. 그리고 그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첫 신호탄은 2022년 닌텐도 공식 팝업스토어였습니다. 매일 3시간 대기는 기본, 한 달 매출 40억 원. 닌텐도를 사려고 용산까지 원정 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발견이었을 겁니다. 2025년에는 일본 인기 캐릭터 작가 나가노의 팝업에서 사전예약 18만 명이 동시 접속해 서버가 다운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쯤 되면 확신이 섰겠죠. "덕후들은 진짜로 온다." 그 확신 위에서 2025년 여름, 아이파크몰은 '도파민 스테이션'이라는 이름의 공간을 열게 됩니다. 이름부터가 선언적이에요. 기분 좋은 자극을 찾는 사람들이 모이는 역(Station). 결과는 프리오픈 50일 만에 누적 100만 명, 일평균 3만 2천 명. 2025년 용산점 총매출은 6,500억 원으로 전년 대비 20% 성장, 12월 한 달 매출만 710억 원으로 역대 최고를 찍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흥미로운 건 숫자가 아니라 콘텐츠의 확장입니다. 처음에는 게임과 애니메이션 덕후들이 중심이었어요. 닌텐도, 플레이스테이션, 코토부키야 — 예상 가능한 라인업이었죠. 그런데 커스텀 키보드 페스티벌을 열었더니 4일 만에 1만 3천 명이 왔습니다. 기계식 키보드라는, 대중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주제인데도요. 이후 유통업계 전반에서 커스텀 키보드 팝업이 잇따라 열렸으니, 아이파크몰이 덕후 트렌드를 유통가에 소개한 셈이 된 겁니다. 불교 콘셉트 팝업 '해탈컴퍼니'는 일평균 1만 명이 찾아와 앵콜까지 이어졌고, 곤충 팝업은 '용산곤충관'이라는 상설 매장으로 정착했습니다. 종이접기, 뜨개질, 빈티지 완구까지. 덕후의 세계에는 경계가 없다는 걸, 이 공간이 매일 증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결국 아이파크몰이 한 건 하나였습니다. 덕후를 만든 게 아니라, 이미 있던 덕후를 알아본 것. 그리고 그들이 마음껏 모이고 놀 수 있는 장을 깔아준 것. 그랬더니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덕후가 몰려오자, 덕후가 아닌 사람들도 "거기 뭐가 있길래 저렇게 줄을 서지?"하면서 따라오기 시작한 거예요. 따라온 사람들은 구경하다 머물렀고, 머무르다 사기 시작했고, 사다 보니 또 오게 됐습니다. 한 매체는 이것을 "오프라인 유통 공간의 새로운 흥행 공식"이라고 표현했는데, 꽤 정확한 요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덕후가 모이는 곳에는, 결국 대중들도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Chapter P
Protocol: 덕후와 함께 가는 브랜드의 원칙C 챕터에서 네 개의 케이스를 살펴봤습니다. 스니커즈 덕후가 플랫폼을 만들고, 인테리어 덕후가 시장을 키우고, 철도 덕후가 노선을 살리고, 용산의 덕후들이 쇠락한 유통 공간을 탈바꿈시킨 이야기였죠.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오르셨을 겁니다. 우리 브랜드는 이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이 강력한 존재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여섯 가지 원칙으로 정리해봤습니다. ① 덕후를 만들려 하지 말고, 알아볼 것 "우리 브랜드의 덕후를 육성하겠다"는 문장이 담긴 기획서를 본 적이 있으시다면, 안타깝지만 그건 출발점부터 어긋난 것일 수 있습니다. 덕후는 육성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니에요. 카테고리에 대한 개인의 깊은 몰입에서 스스로 태어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브랜드는 뭘 해야 할까요? 만들 수 없다면, 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알아보는 방법은 생각보다 여러 가지가 있어요.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건, 우리 카테고리의 덕후 커뮤니티를 찾아서 한 달만 관찰하는 겁니다. 그들이 어떤 언어로 대화하는지, 어떤 기준으로 제품을 평가하는지, 무엇에 열광하고 무엇에 실망하는지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유료 리서치 보고서보다 정확한 카테고리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미 들어와 있는 피드백 속에서 덕후를 식별하는 것입니다. CS나 VOC를 들여다보면, "그냥 별로예요"라는 리뷰 사이에 "이 부분의 소재가 전작 대비 후퇴한 것 같은데, 혹시 공급처를 바꾸셨나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덕후예요. 이런 피드백을 일반 불만과 같은 칸에 분류하지 말고, 따로 모아서 제품팀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큰 차이가 납니다. 세 번째는, 우리 제품을 뜯어보거나 개조하는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커스터마이징하고, 분해하고, 비교 실험을 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제품을 "쓰는" 게 아니라 "연구하는" 것이고, 그 연구에서 나오는 콘텐츠는 브랜드가 절대 만들 수 없는 종류의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 의외로 가까운 곳에 덕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조직 안에요. 이 카테고리가 좋아서 이 회사에 들어온 직원, 퇴근 후에도 관련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직원. 이 사람의 시선은 마케팅팀의 기획보다 덕후 커뮤니티의 온도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내부의 덕후를 발견하고 그 시선을 존중하는 것, 이것도 덕후를 알아보는 아주 중요한 방법입니다. ② 장(場)을 만들되, 운영하려 하지 말 것 덕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건 브랜드의 관리가 아니라,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장입니다. 무신사가 초기에 한 것, 오늘의집이 해온 것, 아이파크몰이 도파민스테이션을 통해 한 것 — 이 사례들의 공통점은 전부 장을 깔아주고 한 발 뒤로 물러난 데 있습니다. 그런데 물러나는 것과 방치하는 것은 다릅니다. 장을 깔아놓고 아무것도 안 하면, 덕후들은 오기는 오되 머물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핵심은 브랜드가 "운영자"가 아니라 "좋은 집주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에요. 좋은 집주인은 손님에게 뭘 하라고 지시하지 않지만, 손님이 편하게 놀 수 있도록 몇 가지는 반드시 챙겨둡니다. 첫째, 화제를 던져주되 결론은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번에 나온 A사 신제품과 B사 신제품, 여러분은 어떻게 보시나요?" 이런 질문 하나면 충분합니다. 덕후는 비교하고 분석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에요. 떡밥을 던져주면 알아서 토론이 시작됩니다. 브랜드가 할 일은 주제를 꺼내는 것이지,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덕후의 콘텐츠에 반응하되 편집하지 않는 것입니다. 덕후가 올린 리뷰, 비교 분석, 사용기에 "좋은 글이네요"라고 반응하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그 글을 브랜드 채널에 옮겨 실으면서 비판적인 부분을 슬쩍 빼거나 톤을 바꾸는 순간, 신뢰는 무너집니다. 덕후의 콘텐츠는 날것 그대로일 때 가장 강합니다. 셋째, 새로운 자극을 주기적으로 공급하는 것입니다. 아이파크몰이 팝업을 릴레이로 돌리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같은 공간이라도 콘텐츠가 바뀌면 덕후는 다시 옵니다. 한정판, 시즌 한정, 선공개, 제작 과정 비하인드 등, "이건 지금 아니면 못 본다"라고 느낄 만한 적시감각 자극 콘텐츠를 꾸준히 흘려주는 것이 장의 온도를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넷째, 덕후끼리 서로를 발견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덕후가 장에 머무르는 가장 큰 이유는, 콘텐츠가 아니라 같은 결의 사람들 때문입니다. "나만 이런 게 아니었구나"라는 감각, 13호에서 다뤘던 팬덤의 원초적 연료가 덕후에게도 똑같이 작동합니다.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덕후와 덕후가 만나는 접점을 만들어주면, 장은 스스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결국 좋은 장이란, 브랜드가 주인 행세를 하지 않되 손님이 계속 오고 싶은 이유는 만들어놓는 공간입니다. 떡밥은 던지되 결론은 덕후에게 맡기고, 콘텐츠는 존중하되 편집하지 않고, 자극은 공급하되 강요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계기는 만들되 관계를 관리하려 하지 않는 것. 이 네 가지만 지켜도 장은 식지 않습니다. ③ 덕후는 응원자가 아니라 심사위원이다 — 이것을 받아들일 것 여기가 팬과 가장 크게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팬은 브랜드를 응원하고, 실수를 해도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사람들이죠. 하지만 덕후는 다릅니다. 덕후는 카테고리 전체에 대한 기준을 갖고 있고, 그 기준에 비추어 브랜드를 심사합니다. 신제품이 나오면 "좋다/나쁘다"가 아니라 "이 카테고리의 현재 수준에서 몇 점짜리인가"를 평가하는 사람들이에요. 불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덕후의 심사는 위협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R&D가 될 수도 있습니다. 먼저, 심사의 기준을 파악해야 합니다. 덕후가 우리 제품을 평가할 때 어떤 기준을 쓰는지를 아는 것 자체가 전략입니다. 그 기준은 브랜드가 세운 게 아니라 카테고리가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온 것이에요. 12호에서 다뤘던 '브랜드의 고집' (→ 12호 '브랜드의 고집' 보기)을 떠올려보세요. 브랜드가 자기만의 기준을 세우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 기준이 카테고리의 기준과 어디서 만나고 어디서 갈라지는지를 아는 것, 이것이 덕후를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다음으로, 심사받을 준비가 된 상태로 제품을 내놓아야 합니다. 덕후들은 겉포장은 물론이요, 소재, 마감, 구조까지 파헤쳐 보는 사람들입니다. "대충 이 정도면 되겠지"라는 자세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덕후가 존재하는 카테고리에서 제품을 만든다는 건 "가장 까다로운 눈을 통과할 수 있는 수준"을 기본값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걸 부담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오히려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스스로 높이지 못한 기준을, 덕후가 대신 높여주고 있는 셈이니까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 심사 결과에 반응하는 방식입니다. 덕후가 칭찬하면 안심하고, 비판하면 방어하는 브랜드가 대부분이에요. 하지만 덕후 앞에서 방어는 최악의 선택입니다. 덕후의 비판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응답은 말이 아니라 다음 제품입니다. 지적받은 부분이 다음 버전에서 개선되어 있을 때, 덕후는 그제서야 "이 브랜드는 듣고 있구나"라고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말로 해명하는 대신 제품으로 답하는 것. 이것이 심사위원 앞에서 브랜드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품격 있는 태도입니다. ④ 덕후의 비평을 제품에 반영하고, 반영했다는 것을 알릴 것 덕후의 심사가 중요한 이유는, 그 피드백의 정밀도가 일반 소비자와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반 소비자의 리뷰는 "좋아요" 아니면 "별로예요"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덕후의 리뷰는 다릅니다. "이번 버전에서 상판 소재를 알루미늄에서 플라스틱으로 바꾼 것 같은데, 촉감이 확 떨어졌다. 원가 절감이 목적이라면 차라리 다른 부분에서 줄이고 여기는 유지해줬으면 좋겠다" — 이런 수준의 피드백이 올라옵니다. 제품팀 회의에서 나올 법한 말을, 돈 한 푼 안 받고 써주는 사람들인 거예요. 문제는 대부분의 브랜드가 이 피드백을 그냥 흘려보낸다는 데에 있습니다. 읽고 끝. 혹은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라는 정형화된 답변을 달고 끝. 이 순간 덕후는 생각합니다. "아, 여기는 안 듣는 곳이구나." 반대로, 덕후의 지적이 다음 버전에 실제로 반영되어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리고 그 사실을 브랜드가 직접 알려주면요? "지난번 출시 이후 커뮤니티에서 상판 소재에 대한 피드백을 많이 주셨습니다. 이번 버전에서는 알루미늄 소재로 복원했습니다." 라고, 브랜드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수렴해주면 덕후는 이 순간 그 브랜드를 "들을 줄 아는 곳"으로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인정은, 커뮤니티 안에서 빠르게 퍼지게 되겠죠. 수용도가 높고 공감력도 좋은 브랜드라는 한 줄 평가가, 어떤 광고보다 강력한 무기가 되게 됩니다. 8호에서 브랜드 페르소나와 섀도우를 다뤘었는데요 (→ 8호 '브랜드 페르소나와 섀도우' 보기), 여기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합니다. 덕후는 브랜드의 감춰진 약점을 누구보다 빨리, 누구보다 정확하게 찾아내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두렵게 여기고 섀도우를 감추려 하면, 덕후는 그걸 또 찾아냅니다. 감출수록 더 깊이 파고드는 게 덕후이니까요. 오히려 먼저 인정하고 개선 과정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신뢰를 얻는 훨씬 빠른 길입니다. 약점을 숨기지 않는 브랜드 앞에서, 덕후는 비로소 심사위원에서 조력자로 태도를 바꾸기 시작합니다. 카테고리에 충성하는 덕후가 특정 브랜드에 호감을 갖게 되는 경로는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경로 — 듣고, 반영하고, 알리고, 약점조차 정직하게 보여주는 것 — 를 꾸준히 걸어가면, 어느 순간 누구보다 나서서 이렇게 말해주고 있을 거예요. "이 카테고리에서 하나만 고르라면, 여기 추천." ⑤ 브랜드 중립을 존중할 것 덕후는 "우리 브랜드의 사람"이 아닙니다. 카테고리의 사람입니다. 경쟁사 제품이라도 좋으면 칭찬하고, 우리 제품이 아쉬우면 가차 없이 지적합니다. 이것을 배신으로 받아들이면 관계는 거기서 끝납니다. 실무 현장에서는 이 중립성을 존중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덕후가 우리 제품을 칭찬하는 글을 올리면 퍼나르고 싶고, 경쟁사를 칭찬하는 글을 올리면 서운하고, 우리 제품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면 댓글로 해명하고 싶어지거든요. 이 세 가지 충동을 다스리는 것이 중립 존중의 실전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덕후가 우리 제품을 칭찬했을 때 그 글을 브랜드 공식 채널에 가져와서 "이분도 인정했습니다!"라고 쓰는 순간, 그 덕후의 중립성은 훼손됩니다. 덕후 입장에서는 "내가 저 브랜드 홍보대사처럼 되어버렸네"라고 느끼는 거죠. 칭찬을 활용하고 싶다면 공유하되, 반드시 원문 그대로, 비판이 섞여 있으면 비판까지 함께 보여주는 것이 맞습니다. "장점만 잘라 쓰는 브랜드"와 "비판까지 함께 보여주는 브랜드" 중 덕후가 어느 쪽을 신뢰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그리고 덕후가 경쟁사를 칭찬할 때, 그것을 위협이 아니라 정보로 읽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덕후가 경쟁사의 어떤 점을 인정하고 있는가"는, 우리가 다음에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가장 솔직한 벤치마크입니다. 경쟁사 분석 보고서를 외주 주기 전에, 덕후가 경쟁사에 대해 쓴 글을 먼저 읽어보세요. 돈이 들지 않고, 훨씬 정확합니다. 결국 덕후의 중립성이 브랜드에게 주는 것은 이겁니다. "이 사람이 우리를 칭찬했다면, 그건 진짜 좋다는 뜻이다." 이 신뢰는 덕후가 다른 브랜드에 대해서도 공정하게 평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립합니다. 중립성을 빼앗으면, 칭찬의 무게도 함께 사라집니다. ⑥ 덕후가 떠나면 쫓지 말고, 제품을 돌아볼 것 팬이 떠나면 관계의 문제입니다. 13호에서 다뤘듯이, 팬이 "동원되고 있다"고 느꼈을 가능성이 높죠. 하지만 덕후가 떠나는 것은 성격이 다릅니다. 덕후는 감정이 아니라 기준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들이 떠났다는 건 우리 브랜드가 카테고리의 기준에서 뒤처졌다는 신호입니다. 이때 가장 흔히 하는 실수가 두 가지 있어요. 첫째는 쫓아가는 것입니다. 할인 쿠폰을 보내거나, 특별 혜택을 제안하거나, "다시 한번 써보시겠어요?"라고 연락하는 것. 팬에게는 통할 수 있지만, 덕후에게는 모욕에 가깝습니다. 덕후는 가격 때문에 떠난 게 아니라 기준 때문에 떠난 거니까요. 둘째는 무시하는 것입니다. "원래 까다로운 사람이니까" "어차피 우리 핵심 고객은 아니니까"라고 넘기는 것. 이것은 가장 정확한 경보음을 꺼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해야 할 일은 이겁니다. 먼저, 떠난 덕후가 어디로 갔는지를 추적하는 것입니다. 어떤 브랜드로 옮겨갔는지를 보면, 우리가 부족한 부분이 어디인지가 보입니다. 덕후는 이유 없이 이동하지 않아요. 떠난 곳과 도착한 곳의 차이가 곧 우리의 개선 포인트입니다. 다음으로, 덕후가 떠나기 전에 남긴 비판을 다시 꺼내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덕후는 떠나기 전에 이미 신호를 보냈습니다. 커뮤니티에 올린 아쉬움, CS에 남긴 구체적 피드백, SNS에 쓴 비교 리뷰. 그때는 그냥 지나쳤던 목소리가, 지금 다시 읽으면 전혀 다르게 들릴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난 덕후를 붙잡으려 하기보다 다음에 올 덕후를 위해 제품을 고치는 것입니다. 덕후의 세계에서는 소문이 빠릅니다. "거기 예전에 좀 아쉬웠는데, 이번에 확 바뀌었더라"는 한마디가 커뮤니티에 돌기 시작하면, 떠났던 덕후가 스스로 돌아오는 일도 벌어집니다. 쫓아간 게 아니라, 제품이 다시 불러온 거죠. Epilogue
덕후가 카테고리를 키우면, 브랜드는 그 위에서 자란다이번 호를 쓰면서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습니다. 13호에서 저는 팬을 의도적으로 만들기란 참 어려운 일이라고 썼었는데, 14호를 마무리하는 지금, 조금 다른 길이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덕후를 팬으로 만드는 것. 이건 어쩌면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생각해보면, 덕후는 이미 그 카테고리에 대한 깊은 기준과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충족하는 브랜드를 스스로 찾고 있는 사람이기도 해요. 일반 소비자를 팬으로 만들려면 기대를 넘어서고, 호명하고, 소속감을 주고, 가치관까지 겹쳐야 합니다. 문턱이 네 개예요. 하지만 덕후에게는 단 하나만 증명하면 됩니다. "이 브랜드는 진짜다"는 것. 브랜드가 중립적인 장을 열어주고, 심사를 피하지 않고, 피드백을 제품으로 답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것. 그 과정을 지켜본 덕후는 어느 순간 심사위원에서 "이 브랜드의 편"이 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팬이 된 덕후의 무게는, 처음부터 팬이었던 사람과는 분명 다를 겁니다. 카테고리 전체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를 선택한 사람이니까요. 그 선택이 갖는 신뢰는,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덕후를 만들어내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니지만, 덕후를 가장 먼저 알아보고 존중하는 건 우리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커뮤니티에서 우리 카테고리를 깊이 파고드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 가장 빠르게 반응하고, 진심을 담아 샤라웃을 보내는 것. 거창한 전략이 아니에요. "이분의 리뷰를 읽고 저희도 배웠습니다"라는 한마디, "이런 시선으로 봐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게 감사합니다"라는 한마디. 이 작은 알아봄이 쌓이면, 덕후는 기억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수많은 브랜드 중에 자기를 알아본 곳이 어디였는지를요. 덕후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덕후가 인정하는 브랜드가 될 수는 있고, 덕후를 가장 먼저 알아보는 브랜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두 가지라면, 오늘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Positively Yours, 이나연 드림 References
박찬용 — 전 에스콰이어·매거진 B 에디터, 《요즘 브랜드》 《첫 집 연대기》 저자 무신사 창업 및 성장 과정 — 무신사 공식 소개 (musinsa.com) 오늘의집 오픈하우스 — 비즈워치 (2025.07.17) 코레일 역명판 레일플러스 교통카드 — 조선일보 (2026.01.06) 한국 지하철 열쇠고리와 일본 철도 덕후 — 조선일보 (2019.02.13) 쵸시전철 생존기 — 일요신문 (2020.09.10) 일본 철도 관광·에키벤 문화 — 강원도민일보 (2025.08.12) 아이파크몰 덕후 전략·닌텐도 팝업·나가노 마켓 — 중앙일보 (2024) 아이파크몰 도파민스테이션 100만 명 돌파 — 패션비즈 (2025.08.20) 아이파크몰 체험형 팝업·키보드 페스티벌 — 뉴시스 (2026.03.30) 아이파크몰 매출 6,500억·기글베이·레고 — 뉴스투데이 (2026.04.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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