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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잠깐의 숨 고르기를 마치고, 엔진을 꽉 채워 다시 돌아온 클럽BCP 노트입니다. 휴재 기간 동안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분들께 당장 써먹을 수 있는 토픽과 레슨이 무엇일지 고민해보았습니다. 쓰고 싶은 이야기도 잔뜩 모아왔고요. 그중에서도 오늘 15호에는 가장 먼저 꺼내고 싶었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독자님께도 괜히 들르고 싶고 찾아보게 되는 브랜드가 있으신가요? 살 것이 없어도 발길이 가고, 다녀오면 내 생활이 조금 나아질 것 같은 그런 브랜드요. 저는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무인양품에 갑니다. 여행을 가고 싶을 때, 또는 일상의 반경 안에서 작은 새로움을 찾고 싶을 때면 더더욱이요. 무인양품 안에 들어서서, 정돈된 선반, 단정한 색, 과하지 않게 쓸모를 보여주는 제품들 사이를 천천히 걷노라면 단정하게 사는 법이란 무엇인지, 공간을 잘 정리하고 사는 일의 기쁨이란 무엇인지 다시 몸에 익혀지는 듯 합니다. 그 기분이 꽤 좋아요. 쇼핑을 할 때마다 그 시점의 저와 제 공간에 필요한 것들이 한두 가지씩은 꼭 눈에 들어오는데요 — 수납함이든, 노트든, 작은 주방도구든 — 그것을 사 들고 돌아오면 제 시간과 공간이 조금 더 체계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이사를 준비하게 되면서 무인양품에 예전보다 자주 들르고 있는 요즘,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Brand is an amusement park, and products are souvenirs”라는 말처럼 — 무인양품이라는 브랜드를 제 삶의 일부처럼 유영하고, 그 안에서 얻은 생각과 태도를 제품이라는 형태로 실체화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물건 하나를 사는 행위를 넘어 이 브랜드가 제안하는 생활의 감각을 얻어오곤 하는 이 오랜 취미가 제 일상, 더 길게는 제 삶을 만들어주는 하나의 습관(habit)이 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아비투스(habitus)라는 말 그 자체일 겁니다. 혹자들은 아비투스를 상류층의 문화나 고급스러움의 향유와 같은 말로 쓰기도 하는데, 저는 그건 조금 좁은 시야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브랜드를 아비투스의 하나로 바라보겠다면, 더더욱이요. 브랜드는 단지 소비되는 대상이 아닙니다. 어떤 브랜드는 하루, 일주일, 일 년을 함께 살아가며 한 사람의 생활 리듬과 선택의 기준을 바꾸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그 반복이 쌓이면, 그것은 취향을 넘어 삶의 태도로 자리잡게 되고요. 이번 클럽BCP 15호에서는 바로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브랜드가 어떻게 제품을 넘어 삶의 방식이 되는지, 그리고 우리가 반복해서 선택하는 브랜드들이 어떻게 우리의 아비투스를 만들어가는지 말입니다.
Chapter B
Brand as Habitus: 브랜드는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이 되는가어떤 이들에게 소비는 지출이 아니라 투자입니다. 내가 읽는 잡지, 내가 머무는 호텔, 내가 지지하는 브랜드는 단순한 물건을 넘어, 나의 지적 수준, 윤리적 태도, 미적 감각을 타인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소리 없이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비언어적 메시지가 되기도 합니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런 작동을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아비투스란 한 사람이 자라온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힌 성향과 감각의 체계입니다. 말투와 자세, 입맛과 미적 판단처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반복하는 선택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브랜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정 브랜드를 반복해서 선택하고 그 가치관에 조금씩 동화될 때, 브랜드는 소비되는 대상을 넘어 우리의 생활 방식과 판단 기준이 됩니다. 먼저 한 가지 경계를 분명히 그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아비투스는 취향과 같지 않습니다. 취향이 선택의 영역이라면, 아비투스는 존재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SNS에서 본 카페가 예뻐 보여서 한 번 가본다면, 그것은 취향의 영역에 머뭅니다. 하지만 그 카페가 어느새 일주일의 리듬을 만들고, 그곳에 머무는 30분이 하루의 농도를 바꾸고, 그곳의 커피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카페를 보는 기준이 되어버렸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때부터 그 카페는 단순히 좋아하는 장소를 넘어, 내가 어떤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인지를 만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취향은 바뀔 수 있지만, 아비투스는 한 사람의 생활 방식 안에 더 깊이 자리 잡습니다. 한번 그렇게 사는 사람이 되면, 다른 방식으로 사는 일이 도리어 어색해지니까요. 여기서 한 가지 통찰이 따라옵니다. 누군가가 한 브랜드를 반복적으로 선택할 때, 그 사람은 단지 제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브랜드가 제안하는 감각과 태도를 조금씩 자기 삶 안으로 들여오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매일 같은 잡지를 펴 보는 사람은 그 잡지가 큐레이션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몸을 움직이는 사람은 그 옷이 약속한 삶의 방식에 가까워지고. 사용자가 브랜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가 사용자 안으로 스며들어 그 사람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아비투스가 된 브랜드는 단순히 좋아하는 브랜드를 넘어, 그 사람을 설명하는 단어가 됩니다. “그 브랜드를 좋아한다”는 한마디만으로도 그 사람이 어떤 감각을 가진 사람인지, 어떤 태도로 살고 싶어 하는지가 드러난다면, 비로소 아비투스라는 표현이 어울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아비투스가 되기 위해, 브랜드는 무엇을 갖추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기 위해, 성격이 다른 네 개의 브랜드를 들여다보려 합니다. 민음사, 콘란샵, 아만, 룰루레몬. 출판과 디자인, 호텔과 의복이라는 서로 다른 카테고리에 있지만, 이 브랜드들은 모두 한 사람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 사람의 감각과 태도를 가다듬는 데 성공한 흔치 않은 브랜드들입니다. Chapter C
Construction: 브랜드 아비투스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Case Study 01
민음사 — 읽는 사람을 만들어온 시간의 축적
민음사는 1966년에 시작된 출판사입니다. 60년 동안 이 출판사가 가장 성실하게 반복해온 일은 단순합니다. 읽을 만한 책을 고르고, 한국어로 옮기고, 다시 읽힐 수 있는 형태로 펴내는 일. 화려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같은 일을 60년 가까이 반복하면, 그것은 한 사람의 독서 습관을 넘어 한 사회의 읽는 방식을 가다듬는 힘이 됩니다. 한번 떠올려 봤어요. 도스토옙스키와 카뮈와 헤세를 같은 출판사, 같은 판형, 같은 디자인으로 가지런히 꽂아둔 책꽂이 — 이 책꽂이는 그 자체로 한 사람의 지적 자기 정의를 보여주는 명함일 겁니다. 또, 어떤 사람의 책꽂이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꽂혀 있다면, 그 책꽂이의 주인은 — 그 시리즈를 다 읽었든 한두 권만 읽었든 — 읽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자기 선언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존재 자체로 한 사람의 결을 보여주는 강력한 아비투스의 도구인 책. 그것을 하나의 출판사, 그 출판사의 고전으로만 사들인 고집은 책 주인의 성향도 은근히 보여줍니다. 요즘은 ‘패션 독자’라는 표현이 자주 들리더라고요? 비꼬는 말처럼 쓰이고도 있지만, 저는 이 표현을 그렇게 가볍게 넘기고 싶지 않습니다. 최근의 분위기에 힘입어 화제가 된 책을 한 권 사 들고 다니기 시작한 사람을 떠올려볼까요. 꼭 완독하겠다는 결심보다, 책을 자기 일상 안에 들여놓는 일이 먼저였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가벼운 입문이야말로 아비투스로 가는 가장 자연스러운 시작입니다. 깊은 독서 습관이라는 건 처음부터 당연하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표지가 예뻐서, 누군가 추천해서, 그 책을 들고 있는 내가 마음에 들어서. 그렇게 시작한 한 권이 두 권이 되고, 두 권이 어느새 책꽂이 한 칸을 바꾸게 되는 일, 그것이 곧 읽는 아비투스가 만들어지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민음사가 60년 가까이 해온 ‘일의 의미’도 여기에 있을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 요즘 민음사의 파이팅 넘치는 행보가 그저 고맙고 반갑습니다. 민음사가 펴내는 책들이 대체로 고전이라는 점이 더 의미롭게 다가오고요. 고전을 읽는 다는 건 인간의 삶을 수십 년, 때로는 수백 년 깊이 들여다본 작가의 시선을 잠시 빌리는 일이잖아요. 패션처럼 시작했더라도 뭐 어때요. 그 책을 한 번 펼치는 순간, 우리는 인류를 키워온 질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될 텐데요. 그리고 그렇게 오래된 질문을 생활 가까이에 두는 일이 반복될 때, 독서는 취향을 넘어 나를 더 의미있게 살아가게 할 사고방식이 될 것이고요! 얼마 전 민음사 김민경 편집자가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체호프의 〈내기〉를 짧게 언급한 뒤, 이 작품의 매출이 눈에 띄게 뛰었다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는데요. 이 이야기를 듣고 지금 민음사가 하고 있는 일을 한 마디로 정리해볼 수 있었어요. 지금 민음사가 하고 있는 일은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입구’를 만드는 일이다 라고. 편집자가 자신의 언어로 책을 말하고, 독자는 그 말에 이끌려 한 권을 집어 들고. 그것이 행여 패션 독서라는 형태를 띌 지라도, 책 읽는 사람이 한 명 두 명 더 늘어나 책 읽는 사회까지도 만들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멋지고 낭만적이며 무해한 유행일까요. 한 사회의 아비투스를 만들어주는 브랜드는 또 얼마나 멋지고요. 그런 의미에서 민음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브랜드가 누군가의 아비투스가 된다는 것은 단번에 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 한 브랜드가 한 가지 일을 충분히 오래, 충분히 착실하게 반복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일이라는 것 말입니다. Case Study 02
콘란샵 — 안목으로 증명하는 법
콘란샵을 만든 사람은 테렌스 콘란(Terence Conran)입니다. 1931년에 태어나 2020년에 세상을 떠난, 현대 영국 디자인의 대부라고 불리는 인물이지요. 그는 영국 사람들의 평범한 거실 안에 모던 디자인이라는 감각을 들여놓았습니다. 1950년대까지 영국의 가정은 빅토리아 시대에서 이어진 무거운 가구, 두툼한 카펫, 격자무늬 벽지로 채워져 있었는데, 그 무겁고 어둡던 거실을 밝고 단순하고 기능적인 공간으로 바꾸게끔 선도한 것이지요. 콘란은 런던 중앙 미술학교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던 시절, 바우하우스와 미술공예운동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한 가지 신념을 갖게 됩니다. 좋은 디자인은 소수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는 이 신념을 두 단계로 펼쳐갔습니다. 먼저 1964년, 런던 첼시의 풀럼 로드에 해비탯(Habitat)이라는 가게를 열었습니다. 스칸디나비아와 프랑스, 지중해의 단순하고 합리적인 가구와 생활용품을, 영국의 중산층이 살 수 있는 가격으로 들여놓는 가게였습니다. 디자인의 민주화라는 그의 신념이 처음 모양을 갖춘 자리였지요. 그로부터 9년 뒤인 1973년, 같은 풀럼 로드 위에 콘란샵(The Conran Shop)을 오픈했습니다. 해비탯이 합리적 가격의 모던 가구를 다뤘다면, 콘란샵은 한 단계 위에서 세계 곳곳에서 가장 신중하게 골라낸 디자인 가구와 사물을 모아냈습니다. 유럽의 미학과 모던한 감각을 절묘하게 섞어낸 큐레이션으로, 콘란의 세계적 명성을 다시 한 단계 끌어올린 가게이기도 했습니다. 두 가게의 관계는 콘란의 사상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대중도 좋은 디자인을 만날 수 있어야 하고(해비탯), 그 위에서 자기 안목을 가다듬을 수 있는 공간도 있어야 한다(콘란샵). 디자인의 민주화는 모두를 똑같이 끌어내리는 평준화가 아니라,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자리에서 안목을 길러갈 수 있도록 입구를 여러 개 만들어 두는 일이라는 시선이었던 셈입니다. 콘란샵의 큐레이션 원칙은 가장 좋은 것들만 모은다(The Best of Everything)는 한 문장으로 정리됩니다. 가구와 조명과 생활용품 가운데 혁신적이고 시대를 잘 견디는 디자인만 골라낸다는 원칙이지요. 그래서 콘란샵은 자기 자신을 ‘신중한 디자인과 큐레이션된 삶의 본거지’라고 소개합니다. 큐레이션된 삶 — 한 사람이 매일 만지고 사용하는 사물들이 그 사람의 삶 자체와 분리될 수 없다는 시선이 그 한 마디 안에 들어 있는 것이지요. 콘란샵에 들어가본 사람이라면 그 매장 안의 어떤 사물 하나도 우연히 거기 놓여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한 점 한 점이 무엇이 좋은 것인가에 대한 누군가의 정성스러운 판단의 결과로 채워진 공간. 사용자가 그 매장에서 한 점을 골라 자기 집에 들이는 일은 그래서 단순히 사물 하나를 사는 일을 넘어, 그 큐레이션의 안목을 자기 안으로 들여오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콘란의 신념이 자기 매장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점도 짚어볼 만 합니다. 그는 1982년부터 콘란 재단을 만들어 디자인 교육과 진흥에 직접 자금을 댔다고 합니다. 1989년에는 런던 버틀러스 와프에 디자인 박물관 설립을 지원해, 디자인이라는 사상을 한 사회의 공공 자산으로 옮기는 일에도 자기 자원을 썼고요. 자기 매장 안에서만 안목을 길러내려 한 것이 아니라 그 안목이 사회 전체로 흘러갈 수 있도록 박물관이라는 공적 구조까지 직접 만들어 둔 거지요. 그가 가구점 주인 이상의 인물이었다는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2020년 콘란이 세상을 떠난 뒤로도 그의 신념은 콘란샵 매장의 큐레이션과 디자인 박물관의 전시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콘란샵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한마디는 단순한 취향 진술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잘 큐레이션된 사물이 한 사람의 일상을 가다듬는다는 신념에 그 사람이 공명하고 있다는 작은 입장 표명에 가깝죠. 어느 집의 거실에 콘란샵에서 들여온 조명 하나가 놓여 있고, 식탁 위에 그곳에서 골라온 그릇 한 점이 올라가 있다면 — 그 집의 주인은 자기가 어떤 안목으로 살아가는 사람인지를 사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안목이라는 말이 본래 어떤 의미인지,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안목은 누가 더 알고 누가 더 모르는가를 가르는 기준이 아닙니다. 매일 만지고 사용하는 사물들을 더 정확히 알아보고, 그것으로 자기 일상을 한 점씩 가다듬어 가는 즐거움에 더 가까운 말입니다. 콘란이 평생을 들여 보여준 신념도 그런 종류였습니다. 디자인이 좋은 삶의 도구가 되도록, 그 도구가 누구에게나 닿도록, 그 위에서 각자가 자기 안목을 길러갈 수 있도록 하는 일. 콘란샵에 처음 들어선 그날 마음에 든 작은 그릇 한 점을 들고 나오는 일이, 한 사람의 아비투스를 가다듬는 긴 여정의 가장 분명한 첫걸음이 되는 까닭이 그래서입니다. Case Study 03
아만 — 세계관으로 동기화하는 법
아만은 1988년 1월 1일, 태국 푸켓의 판세아 해변 한 코코넛 농장에서 첫 문을 열었습니다. 처음부터 호텔을 지으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호텔리어 애드리언 제차(Adrian Zecha)는 자기 휴가용 별장을 지을 땅을 찾다가 이곳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눈앞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던 모양입니다. 혼자만 누리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했고, 결국 계획을 바꾸게 됩니다. 자기 별장을 짓는 대신, 친구들을 초대할 수 있는 작은 호텔을 짓기로 한 것입니다. 은행은 대출을 거절했습니다. 객실 수가 40개뿐인 호텔은 사업성이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당시 호텔 업계의 상식은 500객실 이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제차는 친구 한 명과 자기 돈만으로 호텔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문을 연 첫 번째 호텔이 아만푸리(Amanpuri)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Aman은 평화, puri는 장소를 뜻합니다. 평화의 장소. 이 이름은 한 호텔의 이름이자, 이후 아만이라는 브랜드 전체를 설명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아만푸리 이후 아만이 일관되게 지켜온 원칙이 있습니다. “광고하지 않는다. 객실 수를 함부로 늘리지 않는다. 표준 운영 매뉴얼에 호텔을 가두지 않는다. 매니저가 자기 호텔을 자기 집처럼 운영하도록 맡긴다.” 광고하지 않는데도 손님이 찾아오는 호텔, 객실이 적은데도 수익을 내는 호텔, 매뉴얼이 없는데도 서비스가 일관된 호텔 등 아만은 처음부터 호텔 업계의 상식을 거의 모두 거스르는 방식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이 거스름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순히 남들과 다르게 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평화’라는 한 단어 안에 담긴 신념이 그만큼 단단했기 때문이지요. 아만이 말하는 평화는 조용한 로비나 비싼 스파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호텔이 자기가 놓인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서 시작됩니다. 애드리언 제차는 호텔이 자연 위에 올라서는 방식으로 지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호텔은 자연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 조용히 자기를 두는 방식으로 지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만의 모든 호텔에는 한 가지 질문이 깔려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연이 잘 보이는 방에 손님을 들일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호텔이 그 자연 안에서 거의 보이지 않도록 사라질 것인가. 이 질문의 차이가 아만을 다른 호텔과 갈라놓습니다. 미국 유타 사막 한가운데 있는 아만기리(Amangiri)가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사방이 붉은 사암 절벽과 모래뿐인 그 환경 안에서, 호텔은 벽 색깔과 형태 자체가 사막을 닮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어디까지가 사막이고 어디서부터가 호텔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 건축이 그 자연 안에서 거의 사라지도록 만든 호텔입니다. 베네치아 운하 옆에 있는 아만 베니스는 또 다른 방식으로 같은 원칙을 지켜내고 있습니다. 이곳은 새 건물을 올리는 대신, 18세기에 지어진 팔라초 파파도폴리(Palazzo Papadopoli)를 그대로 살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미 그 도시가 쌓아온 시간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는 방식이지요. 호텔이 자기를 줄이고 비키는 일을, 사막에서는 색의 동화로, 베네치아에서는 시간의 동화로 풀어낸 것입니다. 이 태도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곳은 중국 상하이 외곽의 아만양윤(Amanyangyun)입니다. 2002년, 중국 사업가 마다둥은 자신의 고향 장시성에서 댐 공사로 1만 그루의 캠퍼 나무와 50채의 명·청대 가옥이 수몰될 위기에 놓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이것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작업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큰 규모였습니다. 15년에 걸쳐 나무와 집을 700km 떨어진 상하이 외곽으로 옮겨야 했지요. 어떤 나무는 천 년이 넘었고, 가장 큰 나무는 80톤에 달했다고 합니다. 식물학자·엔지니어·건축가·고대 건축 장인들을 총동원해 집을 한 조각씩 해체하고 나무를 뿌리째 뽑아 옮기고 다시 심고 짓는 작업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80%의 나무가 살아남았고, 아만의 창립자 애드리언 제차가 2009년 이 이야기를 듣고 마다둥을 찾아간 것이, 보존된 숲과 집들 위에 세워진 호텔 아만양윤으로 이어졌습니다. Yangyun은 ‘구름을 기른다’는 뜻이자 ‘자기를 수양한다’는 뜻입니다. 이 호텔의 본질이 그 이름에 담겨 있습니다. 이 모든 사례에는 하나의 태도가 관통합니다. 자연을 호텔의 배경으로 쓰지 않겠다는 태도. 멋진 경관이 보이는 곳에 멋진 건물을 짓고, 그 풍경을 상품처럼 내세우는 호텔들과 다르게, 아만은 자연이 원래의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호텔이 자기를 낮추는 쪽을 택합니다. 필연적으로 아만에서의 숙박비는 비쌀 수 밖에 없어졌지만, 중요한 것은 비싸지게 된 이유와 태도의 순서에 있습니다. 비싸 보이기 위해 자연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자연을 해치지 않으려는 방식을 끝까지 밀고 가다 보니, 그만한 비용이 들게 된 것입니다. 이 순서를 이해해야 아만이라는 브랜드를 오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신념을 이해하고 동의하는 사람들은 한 번 아만에 머문 뒤 다른 호텔로 쉽게 돌아가지 못합니다. 손님들이 스스로를 ‘아만정키(Amanjunkie)’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아만정키는 단순한 단골 그 이상입니다. 아만이 있는 곳을 먼저 찾고, 그곳을 중심으로 여행 일정을 짜는 사람들입니다. 이 호칭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이 브랜드가 붙여준 이름이 아니라 손님들이 스스로 만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한 브랜드를 반복해서 선택하는 일이 어느 순간 자기 정체성을 설명하는 말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만을 좋아한다는 말은 단순히 조용하고 비싼 호텔을 좋아한다는 뜻을 넘어, 자연 앞에서 호텔이 자기를 낮추는 방식을 지지한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 태도에 공감하게 되면 여행을 대하는 방식도 조금씩 달라지게 됩니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은 것을 가져가는 여행이 아니라, 그 장소가 원래 가진 것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머무는 여행. 아만은 손님에게 그런 자세를 반복해서 경험하게 합니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 여행을 고르는 기준도 달라지게 됩니다. 어디가 더 화려한가보다, 어디가 그 장소를 더 잘 존중하고 있는가를 보게 되고, 어떤 호텔이 더 많은 것을 제공하는가보다, 어떤 호텔이 덜어낼 줄 아는가를 보게 되는 거죠. 아만이 누군가의 아비투스가 되는 방식은 여기에 있습니다. 강한 세계관을 만들고, 그 세계관을 모든 호텔에서 일관되게 경험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 경험에 동의한 사람들이 자기 여행의 기준을 그 세계관에 맞춰 다시 세우게 하는 것. 이렇게, 아만은 호텔을 고르는 방식을 바꾸고, 더 나아가 여행을 대하는 자세까지 바꾸는 중입니다. Case Study 04
룰루레몬 — 몸으로 체화시키는 법
룰루레몬이 시작된 곳은 1998년, 캐나다 밴쿠버의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였습니다. 낮에는 옷을 만들고, 밤에는 사람들이 모여 요가 매트를 펴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창립자는 한 가지 장면을 관찰합니다. 면 소재 옷을 입고 요가를 하던 여성들이 동작을 깊게 이어갈수록, 옷이 땀을 머금고 무거워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천은 몸에 달라붙고, 모양은 흐트러지고, 움직임은 불편해지고. 옷이 몸의 움직임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룰루레몬은 이 작은 관찰에서 시작됩니다. 몸이 하려는 일을 정확히 받아내는 옷을 만드는 일. 이 출발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룰루레몬은 처음부터 옷을 만든 회사가 아니라 몸의 동작을 받아내려고 한 회사입니다. 다른 의류 브랜드들이 입는 사람의 외양을 가다듬는 일에서 출발했다면, 룰루레몬은 입는 사람의 동작을 가다듬는 일에서 출발했습니다. 이 차이가 사소해 보이지만, 한 브랜드가 옷을 파는 일을 넘어 한 사람의 매일의 동작에 끼어들 수 있는가의 차이를 결정합니다. 이 출발에 맞게, 룰루레몬은 옷을 파는 매장과는 다른 구조를 처음부터 설계했습니다. 보통 의류 브랜드의 매장 직원이 Sales Associate라고 불리는 것과 달리, 룰루레몬의 매장 직원은 Educator라는 호칭으로 불립니다. 옷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일에 대한 이해를 건네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매장 역시 옷을 사러 오는 공간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룰루레몬은 매장에서 무료 요가 클래스를 정기적으로 운영해왔고, 2010년 기준 연간 6만 명 이상이 이 클래스에 참여했대고 해요. 처음에는 옷을 보러 들어왔을지 모르겠지만, 어느 날 매장 한쪽에서 요가 매트를 펴고, 자기 몸을 바닥에 눕히고, 호흡을 가다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 그 순간부터 매장의 의미는 조금 달라지게 되겠지요. 물건을 고르는 곳이 아니라, 새로운 동작을 일상 안으로 들여오는 계기로 말입니다. 앰배서더(Ambassador) 프로그램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룰루레몬은 매장이 있는 지역의 요가 강사, 필라테스 강사, 운동선수들에게 옷을 제공하고, 그들의 피드백과 실제 사용 경험을 브랜드 안으로 가져왔습니다. 2018년 기준 이 앰배서더 수는 1,500명을 넘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단순히 유명인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룰루레몬이 먼저 주목한 사람들은 그 지역에서 실제로 매일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크리스틴 데이 전 CEO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 우리는 셀러브리티가 아니라 진짜 사용자에게 제품을 줬다.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의 유명도가 아니라 진짜로 몸을 움직이는 일상이 그 옷의 신뢰 기반이 되도록 설계해둔 것입니다. 룰루레몬에게 중요한 것은 옷을 입은 사람의 유명도가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몸을 움직이는가, 그 옷을 입고 매일 땀을 흘리는가, 그 일상이 곧 제품의 신뢰가 될 수 있는가 였습니다. 룰루레몬이 오랫동안 전통적인 광고 비중을 낮게 유지해온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광고로 “이 옷은 좋다”고 말하기보다, 그 옷을 입고 실제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입니다. 옷을 설명하는 대신, 옷이 쓰이는 장면을 계속 만들어낸 셈입니다. 흥미로운 장치가 하나 더 있습니다. 룰루레몬의 매니페스토입니다. 룰루레몬은 매장 벽과 쇼핑백 측면에 자기들의 신념을 문장으로 새겨두었습니다. “하루에 한 번 너를 두렵게 하는 일을 해라. 매일 땀을 한 번 흘려라. 이것은 너의 연습 인생이 아니다. 이게 전부다.” 옷을 사 들고 매장을 나오는 사람이 손에 든 쇼핑백 자체가 — 몸을 움직이는 사람으로서의 자기 인식을 매일 강화해주는 작은 텍스트로 작동합니다. 이 모든 장치들 — 매장 무료 요가 클래스, 앰배서더 프로그램, 매니페스토 쇼핑백, Educator라는 호칭 — 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집니다. 이 브랜드는 옷을 파는 일이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매일 강화하는 일을 한다는 것. 룰루레몬을 입는 일은 그래서 단순한 옷 입기가 아니라, 어떤 상태로 하루를 시작하겠다는 작은 의식에 가까워집니다. 매일 아침 그 옷으로 갈아입는 동작 자체가, 나는 내 몸을 돌보는 사람이라고 매일 나 자신에게 보내는 작은 신호가 되는 것이지요. 부르디외가 체화(hexis)라고 불렀던 ‘몸으로 익혀진 아비투스’가 가장 가시적으로 작동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머리로 “건강을 챙겨야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매일 아침 같은 옷으로 갈아입고 몸을 움직이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결심에 가깝지만, 후자는 반복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더 깊이 바꾸는 것은 때로 결심보다 반복입니다. 룰루레몬이 한 사람의 아비투스가 되는 방식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룰루레몬은, 한 브랜드가 누군가의 아비투스가 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머리에 메시지를 새기는 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통찰을 제공해줍니다. 옷을 갈아입는 일, 매트를 펴는 일, 땀을 흘리는 일, 집으로 돌아와 다시 세탁해두는 일. 그런 반복 속에 브랜드가 자리 잡을 때, 비로소 브랜드는 한 사람 속에서 자기 몫을 가지게 됩니다. 룰루레몬은 이 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브랜드입니다. 자기 브랜드의 본질이 옷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을 입고 몸을 움직이는 매일의 동작에 있다는 것을요. 룰루레몬은 단지 옷을 팔지 않습니다. 그 옷을 입고 싶어지는 이유와, 그 옷을 입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감각을 팝니다. Chapter P
Practice: 우리 브랜드도 누군가의 아비투스가 될 수 있을까여기까지 읽으신 분 중에는 이런 생각을 하신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거대한 브랜드들과, 내가 만들고 있는 작은 브랜드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내 브랜드도 누군가의 아비투스를 만들 수 있을까. 있습니다. 너무나도 있습니다. 그리고, 브랜드의 규모와 관계 없이, 생각의 크기가 단단한 브랜드라면, 이미 누군가의 아비투스를 만들어가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카페를 예로 들어볼께요. 손님이 마시는 커피 한 잔은 단지 갈증을 해결하기 위한 음료일 수도 있지만, 혹은 그 한 잔에 담긴 카페 마스터의 태도와 세계관을 함께 마시는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둘 사이의 차이는 카페 입장에서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사용자에게는 결정적입니다. 만약 그 카페가 자기가 쓰는 원두를 어떤 농장에서 어떤 조건으로 들여오는지를 손님에게 정직하게 보여주는 카페라면 — 그 카페의 단골들 가운데 누군가는, 어느 시점부터 커피 농장의 열악한 노동 환경에 공감하고 그것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카페가 그 사람의 윤리적 태도라는 아비투스를 가다듬는 일에 작은 역할을 한 셈입니다. 또 다른 단골은, 카페에서의 그 한 잔을 자기를 깨우는 작은 명상으로 받아들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카페인이 몸에 좋지 않다는 세간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그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이 — 자기 하루의 농도를 정하는 자기만의 의례가 되어 있는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카페에 머무는 30분이, 일상의 소음에서 잠시 비껴난 온전한 휴식의 시간이 되도록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세 가지 경우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은 결국 손님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카페 마스터가 모든 사용자에게 우리 커피로 명상을 하세요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 커피가 그렇게 마실 만한 깊이를 가지고 있다면 — 어떤 손님은 자기 식으로 그 의미를 찾아냅니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한 방법이 가능하도록 카페가 설계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이것이 한 브랜드가 누군가의 삶 안으로 들어가 아비투스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명확한 분기점입니다. 이렇게 보면, 누군가의 아비투스가 되기 위한 브랜드의 과제는 사실 거대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브랜드가 누군가의 삶에 어떤 영향을 만들어줄 수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그리고 그 영향이 사용자의 일상 안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발화될 수 있도록 작은 장치들을 만들어두는 것 — 어쩌면 그 정도의 일일 겁니다. 매장의 한 디테일, 메뉴판 한 줄, 손님에게 건네는 한마디, 포장지 안쪽의 한 글귀. 이런 것들이 모여 사용자가 자기만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여백을 열어줍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그 모든 설계의 가장 깊은 곳에는, 결국 기획자 자신의 아비투스가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카페가 누군가의 윤리적 태도를 가다듬을 수 있는 이유는 — 그 카페 마스터 자신이 윤리적 태도를 자기 일상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호텔이 누군가의 자연관을 바꿔놓을 수 있는 이유는 — 그 호텔을 만든 사람이 자연 앞에 엎드리는 자세를 자기 삶 안에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목이 흐릿한 사람이 만든 브랜드가 누군가를 가다듬을 수는 없습니다. 브랜딩이 결국 타인의 삶에 개입하는 일이라면 — 그 개입의 책임감은 다른 무엇이 아닌, 자신이 어떤 아비투스로 살고 있는가에서 오게 됩니다. 우리 브랜드를 통해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 한 브랜드가 누군가의 아비투스가 되었는지를 가늠하는, 가장 정직한 척도입니다. 우리 브랜드도 누군가의 아비투스가 될 수 있을까다섯 가지 점검 질문 ① 우리는 한 가지 일을 충분히 오래 반복하고 있는가 분기 실적이나 트렌드 앞에서 브랜드의 핵심을 너무 자주 바꾸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가 오래 반복해온 일, 그리고 앞으로도 쉽게 바꾸지 않을 기준은 무엇인가. ② 우리 브랜드의 사용자는 우리를 좋아한다는 한마디로 자기를 설명할 수 있는가 우리 브랜드를 좋아한다는 말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한마디로 드러내주는가. 우리 브랜드가 그 사람을 설명하는 고유명사가 되어 있는가. ③ 우리만의 세계관이 있는가 다른 브랜드의 문법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우리만의 시선과 신념이 있는가. 그리고 그 세계관은 누군가가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고 느낄 만큼 매력적인가. ④ 사용자의 반복되는 동작 안에 우리 브랜드가 들어가 있는가 가끔의 좋은 선택이 아니라, 사용자의 일상 리듬 안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우리 브랜드가 사용자의 습관이 되어 있는가. ⑤ 우리가 만들어주려는 아비투스를 우리 자신이 살고 있는가 사용자에게 제안하는 삶의 방식을 우리도 실제로 살고 있는가. Epilogue
누군가의 아비투스가 된 브랜드의 가장 따뜻한 정의부르디외가 아비투스라는 개념을 처음 이야기한 맥락은, 사실 이번 호에서 제가 사용한 방향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에게 아비투스는 계급이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를 설명하는 비판적 도구였습니다. 한 사람의 취향은 온전히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계급의 코드를 무의식적으로 익힌 결과에 가깝다는 것이지요. 그가 아비투스를 다룬 책의 제목을 《구별짓기》라고 붙인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하지만 이번 호에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아비투스는 누가 더 알고, 누가 더 세련되었고, 누가 더 높은 취향을 가졌는지를 가르는 개념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습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알고, 그것을 더 잘 좋아하기 위해 자기 일상을 조금씩 가다듬어가는 즐거움. 저는 브랜드가 만드는 아비투스를 그런 쪽으로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책꽂이를 하나씩 채워가는 일. 이런 작은 반복들은 겉으로 소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 삶을 조금 더 자신답게 만드는 방식이 됩니다. 그리고 좋은 브랜드는 그 반복을 이끌고 반복을 통해 사람들의 삶 속에 자기 자리를 만들어 냅니다. 누군가의 아비투스가 된 브랜드는 단순히 자주 사는 브랜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생활 안에서 기준이 되고, 습관이 되고, 때로는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언어가 됩니다. 브랜드가 한 사람의 삶 안에 자기 몫을 갖는다는 것은 아마 그런 일일 겁니다. 물건을 하나 더 파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삶을 조금 더 좋아할 수 있도록 돕는 일. 누군가의 아비투스가 된 브랜드의 가장 따뜻한 정의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Positively Yours, 이나연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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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cm 두께 브랜딩 책을 20분짜리 노트로 읽자